위암도 극복했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 압록강대교 인근에서 바라본 북한 신의주지역에서 주민들이 일을 하고 있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 압록강대교 인근에서 바라본 북한 신의주지역에서 주민들이 일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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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병중에도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질병이 있습니다. 한 번 걸리면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암. 요즘은 의료기술이 좋아져서 웬만한 암은 초기에 발견하면 완치를 해서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볼 병은 결코 아닌데요. 오늘은 나를 굴복시킬 병은 없다고 말하는 탈북여성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함경북도 청진 출신의 여성 노우주 씨.

노우주: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도 좋은데 그래도 새로운 자유의 땅 한국에서 살아가는데 좋은 이름을 가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옥돌 주에 주인 주로 해서 비옥한 땅에서 살아가는 주인이다.

남한에 가서는 이렇게 이름도 바꾸고 한 번 멋지게 살아보자 다짐합니다. 그런데 병을 얻어 대수술을 받습니다.

노우주: 북한에서 나올 때 건강이 안 좋았어요. 제가 두 번 잡혀서 한번은 북한에서 1년을 노동단련대에 있었어요. 벌써 보위부에 들어가면 살이 쭉쭉 빠져요. 먹는 것이 없고 술찌꺼기 반공기씩 주고 이러면 벌써 설사가 나면서 뼈만 남게 돼요. 보위부 감옥에 보름 회령 노동단련대에서 3개월, 함경북도 청진 도집결소에 보름 있고 제가 거주하던 청진시 라남구역에서 6개월 단련대 생활을 했어요. 그러니까 거의 1년 노동단련대에 있으면서 먹지 못하면서 한겨울 통나무 끌어내리고 하면서 다리가 다 얼고 손이 얼고 그랬죠. 몸이 너무 약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빨리 움직이면서 일을 못한다고 맞고 하면서 완전히 영양질조가 왔어요. 북한에선 일명 강영실이라고 해요. 강하게 영양실조가 왔다 이런 뜻이거든요. 제가 재탈북할 때 체중이 36kg이었어요.

잘 먹지 못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는 북한식 우스갯말인 강.영.실 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살았다는 당시 노 씨의 나이는 30대 후반. 왕성하게 활동하며 당 사업에는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던 여성입니다. 그런데 험한 일을 경험하고도 다시 탈북한 것은 왜일까?

노우주: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북한에 있을 때는 여맹위원장, 인민반장 사업을 했어요. 서른부터 나오기 전인 서른일곱까지 했어요. 그러면서 중국에 한 번 들어와서 붙잡혀서 그런 곤혹을 치렀는데 머리가 확 돌더라고요. 중국은 14억 인구가 쌀밥에 고깃국 먹기 싫어 안 먹고 짐승도 쌀밥을 먹는데 조그만 땅덩어리에 뭐 그리 숨길 것이 많고 감출 것이 많아서 백성이 굶어 죽는데도 아랑곳 않고 여맹위원들 데리고 아편진 따러 다니고 도로건설 나가고 발전소 건설 이렇게 나가 장사도 못하게 사회노동을 많이 했거든요. 제가 중국에서 6개월 정도 있을 때 남한 드라마를 보고 노래를 듣고 방송을 들으면서 너무 자유스러운 것을 체험했잖아요. 그러다나니까 지금껏 내가 우리 북한주민이 속아 살아왔구나.

북한에서도 노동단련대 생활을 안 해본 사람은 모를 겁니다. 제일 약한 처벌을 받는 곳, 노동으로 죗값을 치루고 새로운 사람이 돼서 사회로 복귀한다는 곳인데 바로 이런 곳에서의 경험이 북한사회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만든 겁니다.

노우주: 6월에 재탈북했어요. 거의 1년 동안 노동단련대 생활을 하면서 치욕적인 경험도 하고 아가씨들이 도망친다고 붙잡아다가 각자로 두드려 패서 다리가 부러지고 그런 처참한 광경 그리고 사람이 굶어 죽어나가는데도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이런 광경을 수없이 목격하면서 사람이 도저히 살수 없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탈북하게 된 거죠.

남한에 간 것은 2007년입니다. 중국에서 공안에게 잡혀 강제북송 위기에 놓이자 마지막 선택으로 남한을 택한 겁니다.

노우주: 중국에는 3년 반 정도 있었어요. 그러다가 다시 잡혀 북송당하면 가족도 무사하지 못하거니와 나도 죽는다. 두 번짼 감옥 1년, 세 번째는 감옥 2년이었어요. 함흥 감옥에 가야 하니까 여기서 자살해 죽는 것보다 못하다 해서 파출소 2층에서 뛰어 내려서 도망쳤지요. 그래서 다시 살아났어요.

북한주민이 탈북한다고 해도 중국 땅에서 바로 남한으로 가기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 국경을 넘어 배나 항공편으로 남한에 가게 되는데 그에 걸리는 시간은 제각각입니다.

노우주: 저희가 아시아나 항공을 타고 태국 감옥에서 1시 30분 정도 나와서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내린 것이 오전 8시였어요. 좀 지연됐다고 하더라고요. 내리니까 국정원 직원이 나와서 참 잘 오셨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는 데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안이 벙벙했죠. 그때는 8월이라 논에도 벼꽃이 피려고 하고 가로수도 우거지고 차가 씽씽 달리고 이런 모습에 정말 반 토막 남조선이 맞는지 날 꼬집어도 보고 내가 남한에 왔다는 것이 꿈같고 그랬거든요.

제2의 고향에서 소개하는 다른 탈북자와 달리 이렇게 길게 탈북 동기와 남한에 도착하는 과정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이제부터 들려드릴 남한에서 벌어진 기구한 사연 때문입니다.

노우주: 저는 북한에서도 사회활동을 많이 했던 사람이었고 성격자체가 남자처럼 화끈합니다. 제가 속을 드러내놓고 2008년 입국해서 경산시에 11월 초에 나왔는데 일주일은 원래 살던 사람이 청소를 안 해서 5일 동안 대청소를 하고 저희를 데려왔던 당시 적십자사 봉사원이 2명 도와줬는데 6일째 되던 날 그분들을 초대해 집들이를 하고 다음날부터 중고 자전거를 사서 길을 익히기 시작했어요. 당시 동네에 있는 간병사 학원에 등록하고 집 주변을 돌았죠. 학원 공부를 하면서 동네 오거리 요양병원에 취직했어요. 열심히 살아 돈을 많이 모아 부자로 살자는 마음으로.

보통 탈북자들은 남한에 가서 자동차를 구입하는데 노 씨는 자전거를 샀습니다. 우선 급한 마음에 자신이 당장 다룰 수 있는 것을 택한 겁니다. 북한에서 유명한 갈매기 자전거보다는 물론 성능이 좋은 자전거입니다. 그리고 경제활동을 시작합니다.

노우주: 저는 부정적인 생각을 해본적이 없어요. 그때 요양보호사 첫 월급을 93만원 받았어요. 요양보호사는 24시간 일하고 교대를 해요. 혼자니까 내가 쓰지 않고 6개월 기초수급비가 나오니까 저축하면 살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또 모르는 것이 있으면 막 물어보거든요. 제가 용감했어요.

첫 월급으로 미화로 800달러 정도 받고 나라에서 나오는 보조금 합해 1천 달러 정도는 수입이 됐으니 생활하기에 크게 부족한 느낌은 없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매일 신나게 희망 속에서 생활하는데.

노우주: 어르신들 목욕을 시켜드리다가 쓰러졌어요.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몽둥이에 맞은 것처럼 아프고 눈을 못 뜰 정도로 아픔이 왔어요. 1월 겨울이었는데 창문을 열고 머릴 내밀고 그랬어요. 너무 메스꺼우니까요. 그리고는 실습 나온 사람에게 제가 두 분 목욕시켰는데 나머지 분을 부탁해 놓고 원장실에 가서 혈압을 제달라고 했어요. 제가 혈압이 80-50이었어요. 북한에서부터 혈압이 낮았어요. 그런데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원장선생님에게 혈압을 제달라고 하니까 몇 번을 해도 혈압이 안 잡힌다는 거예요. 죽은 사람 혈압인데 이 몸을 가지고 어떻게 일했냐고 간호장을 불러 링거를 맞춰줬죠. 피가 돌지 않아서 오후 4시 반에 맞았는데 저녁 9시가 되도록 큰 병의 3분지 1도 안 들어갔어요.

캄캄한 밤이 되니 집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자신이 늘 돌보던 중환자 어르신들이 누워있고 하니까 갑자기 더 막 답답해 진겁니다. 그리고 다음 날 병원에 가는데요. 이 일이 있었던 것은 노우주 씨가 남한 사회에 나와 2개월 반 만에 벌어진 일입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에서 위 암 선고를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노우주 씨의 탈북해서 암 선고를 받기 직전까지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암 투병 과정에 대해 전해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