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딸 윤혜련을 찾습니다

경기도 파주 임진각을 찾은 시민들이 임진강 철교 너머 북녘땅을 바라보고 있다.
경기도 파주 임진각을 찾은 시민들이 임진강 철교 너머 북녘땅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0:00 / 0:00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북이 갈라져 사는 현재 이산가족의 고통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탈북으로 생이별을 했던 김순희 씨는 10년 전 헤어진 큰딸 윤혜련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산에 사는 김순희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순희: 우울증으로 나가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고 누구 만나기도 싫고 뇌경색 후유증 진단을 받았어요. 혈관이 막혀서 치료도 받고요.

양강도 혜산시 출신의 김순희 씨는 몇 년 전부터 몸이 많이 상해 요양치료중입니다. 김 씨가 이렇게 된 것은 큰 딸을 너무도 그리워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김순희: 2006년에 살기기 힘들어서 다 굶어죽게 됐어요. 가족이 다 탈북을 하자니 잡히면 죽을 것 같아서 큰딸이 동생을 데리고 먼저 가라고 자기는 힘들어도 남겠다고 했어요. 연락을 하면 큰딸이 넘겠다고 하고 한 달 뒤 연락을 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좀 시간이 걸리다 보니까 다른 사람이 딸을 넘겼더라고요. 그래서 연락이 끊겼어요.

고난의 행군 시기도 아니고 경제란에 가족의 생계마저 곤란한 지경에 이른 것은 한 번의 큰 사건 때문입니다.

김순희: 2005년 텔레비를 가지고 함흥에 장사를 나갔다가 사기를 당해 하나도 값을 못 받았어요. 집도 뺐기도 가족이 거리에 나앉게 됐거든요.

기자: 텔레비전 몇 대를 가지고 가셨는데요?

김순희: 텔레비를 8대를 가지고 갔었죠.

남한에는 2009년 여름 도착합니다. 중국에서는 2년 정도 있었습니다. 작은 딸 향심이만 데리고 남한 땅을 밟습니다.

김순희: 남한은 소가 쌀을 먹는다고 하잖아요. 북한 사람들이 들으면 놀라겠지만요. 제일 아까운 것이 음식 쓰레기예요. 북한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헤매는 꽃제비가 눈이 선하거든요. 음식 찌꺼기라고 하지만 먹을 만한 것이거든요. 남한은 자유가 있는데 북한은 김일성 체제만 우상화만 해서 누구도 말을 못하지만 여기선 대통령도 잘못하면 막 욕하고 비판을 하잖아요. 이것이 자유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어요. 이런 것을 느끼지 못하니까 북한 사람들이 불쌍하죠.

김순희 씨는 풍족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북한에서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동생에게 물건도 내보내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그마져 어렵게 됩니다.

김순희: 그것을 모르는 것이 가슴 아프죠. 여긴 누구나 한 대씩 차를 한 대씩 다 가지고 있고 옷도 헐은 것을 입는 사람이 없잖아요. 옷 수거함엘 가보면 입을만한 것을 다 버리고요. 이걸 북한에 가져다주면 얼마나 좋아요. 북한에 동생이 있어서 북한에 그런 옷을 많이 내 보냈는데 이젠 그것조차 할 수 없는 것이 가슴 아파요. 국경 경비가 너무 강화돼서 그것마저 못 내보내게 됐어요. 3년 전에 보내고 그랬어요. 옷, 간식, 생활필수품 좀 넣어서 보내줬거든요.

기자: 간식은 뭘 말하는 겁니까?

김순희: 사탕과자. 그런 것을 보내주면 너무 좋아했거든요. 여기서 보내면 중국 사람들이 남한 것을 먹고 중국 것을 사서 북한에 내보내고 그랬거든요.

남한생활 7년. 열심히 새로운 곳에 뿌릴 내리고 정착합니다. 그런데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주질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탈북자이면서 소득도 없어 정부에서 생계지원을 해주는 겁니다.

김순희: 저도 지금 일을 못하는 상태거든요. 처음 나와서는 조금 일하고 지금은 몸이 아파서 일을 못하는데 정부에서 기초생활수급자라고 지원하는 돈이 있는데 그것 가지고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거든요.

하루 종일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으면 특별히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지진과 큰물난리 등 자연재해로 피해복구 상황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러면 또 북한 생각이 난다고 하네요.

김순희: 이번에 부산, 울산, 제주도에 물 폭탄을 맞았거든요. 지진도 경주와 부산 지역도 지진 피해를 입었고 했는데 벌써 대통령도 왔다 갔고 여야 대표도 다 왔다 갔고 정부에서 비상대책위원회를 열어서 피해복구 지원을 하거든요. 북한은 손망치를 가지고 복구 작업을 하지만 여기는 장비를 다 동원해 하니까 빠르죠. 물난리가 나니까 자기 자체로 하고 구청에서 맡아하고요. 바라지 않아도 정부에서 도와주니까 북한하고야 다르죠.

보통의 경우 탈북자는 남한에 가서 몸이 아프면 의료보험 혜택을 받아서 경제적 부담 없이 지병치료를 할 수 있습니다.

기자: 쉽게 해결을 보셨나요? 아니면 경제적으로 힘들었나요?

김순희: 저는 의료급여 1종이라 돈을 내는 것이 없어요. 큰 병에 걸렸어도 돈을 안내고 정부에서 도와줘서 괜찮아요.

10년 전 북한에서 생이별을 한 큰딸 윤혜련 생각에 마음의 병까지 얻게 된 김순희 씨는 올해가 다 가기 전에 꿈에도 그리는 모녀상봉이 현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김순희: 그러면 딸에게 쓴 편지로 마무리를 할께요.

사랑하는 내 딸 혜련이에게 어느덧 세월이 흘러 햇수로 10년이 지났구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내 딸 혜련이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지? 향심이가 이젠 제법 처녀티가 나는데 혜련이는 더 예뻐졌겠는지? 사랑하는 내 딸 혜련아! 지금 어디에 있느냐? 불러도 몇 년을 불러도 대답이 없고 연락조차 없으니 어디에 그리도 꽁꽁 숨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이리 마음고생을 할 줄 알았으면 탈북할 때 죽어도 너를 떼어놓지 말고 같이 탈북 했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를 해야 뭣하겠니? 이렇게 후회를 할 줄 알았으면 함흥에 가서 장사하다가 사기 당해 미처 오지 못하여 어린 향심이를 데리고 고생하면서 경순이와 류경이네 개를 팔아서 5천원을 가졌다고 장작으로 너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사정없이 때린 것을 이 가슴에 한이 맺혀 죽어도 풀릴 것 같지 않으니 이 한을 엄마는 어찌 갚고 죽으란 말이냐? 제발 죽기 전에 엄마의 한을 풀게 엄마 앞에 나타나 엄마의 손으로 따뜻한 밥 한 그릇 지어줄 수 있게 해주렴. 내 딸 혜련아! 이제 찬바람이 불어오는데 어느 곳에 있는지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엄마의 품으로 돌아와 다오. 엄마의 품으로 돌아올 혜련이를 그려보며 엄마로부터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에서 큰딸 윤혜련을 애타게 찾고 있는 김순희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