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 표현에 '척하면 척하고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굳이 말로 설명을 다 하지 않아도 눈빛만 봐도 또는 표정만 봐도 상대가 원하는 것이 뭔지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서로 소통이 잘된다는 건데요. 오늘 소개하는 남성은 남북의 문화차이가 너무 심해 초기정착이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올해 57살의 탈북자 김순교씨의 얘기입니다.
김순교: 고난의 행군시절 사람들이 자고 나면 굶어죽고 할 때입니다. 우리 마을 북청에서도 거의 20% 굶어 죽었습니다.
김 씨가 북한을 떠난 것은 1998년입니다. 결국 먹고 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 나왔다가 바깥세상을 알게 됐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는 인권이 뭐고 자유가 뭔지 개방경제체제를 알지 못했는데 중국에 가보니 새로운 세상이 있었던 겁니다. 기쁨보다는 배신감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순교: 먹고 살려고 중국에 왔다가 진실을 알게 된 것은 2-3년 걸렸습니다. 너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한 3년 되니까 알겠더라고요. 한줌도 안 되는 그런 권세자들을 위해 노예 생활을 한 겁니다. 그걸 알고 나니까 너무 황당한 겁니다. 술만 마셨어요. 내가 설자리가 없는 겁니다. 북한에 가도 탈북자라고 처형당하지 중국에서는 숨어살아야지 살 의욕이 없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막 술로 살았습니다.
거의 10년동안 김 씨는 중국에서 숨어살았습니다. 신분 노출이 되면 다른 곳으로 옮기길 수 십 번을 하다가 2009년 남한입국에 성공합니다. 그때는 참 여러 면에서 의욕이 넘쳤고 남한사회를 빨리 알고자 대학에도 진학하는데 맘대로 잘 안됩니다.
김순교: 쉽지 않지요. 남한 대학생들과 어울려서 문화를 알려고 접근을 했는데 문화장벽이 나를 바보를 만들고 날 소심하게 만들더라고요. 내가 접근하려고 했는데 많은 오해가 생기고 하니까 어렵더라고요. 마음이 통하지 않으니까 내 마음을 반대로 오해를 하더라고요.
기자: 대충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하겠는데 문화장벽이 뭘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김순교: 예를 들면 우리 학급에 누군가 라면을 한 박스 가져왔어요. 북한에선 일단 가져오면 공동으로 먹거든요. 그렇게 생각하고 내가 먹었어요. 그런데 자기 것을 말도 안하고 누가 먹었는가?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제가 무안당한 적이 있어요.
그 다음부터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다른 사람을 의식해 움츠려 들고 말도 조심하게 되고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안하게 됩니다. 소심하게 되더란 겁니다. 김순교 씨가 생각했던 남한생활은 더 없이 자유롭고 뭐든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사회였는데 현실의 장벽에 부딪힌 겁니다.
김순교: 원래는 그 때 알기로는 열심히 성실하게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탈북자들은 외국으로 가고 하는데 나는 우리말을 쓰고 하니까 한국을 택해 왔어요. 그런데 정작 와보니까 문화가 너무 틀린 겁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는데 원주민이 아니란 점과 나이가 많다는 것 때문에 자꾸 밀리더라고요. 나이에 관계없이 일할 수 있는 것이 뭔가 했는데 이런 복지 쪽이더라고요. 해보니까 내 적성에 맞는 겁니다.
기자: 얼마나 지내보니까 남한 생활을 알겠던 가요?
김순교: 1년이요 1년이 지나니까 알겠더라고요. 일을 닥치는 대로 했는데 힘도 딸리고 또 여기는 사람 인맥관계가 작용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래서 알게 됐습니다. 처음 와서 운전 면허증을 따고 1년 지나서 요양보호사 자격증 따고 그 다음 사회복지 자격증 따고 저녁에는 신학 공부하고 그러다 보니 5년이 금방 지났습니다.
기자: 사회복지 자격증은 대학을 다니셨습니까?
김순교: 대학 다녔습니다. 제주국제대학 사회복지과를 졸업했습니다. 1년을 요양보호사 하면서 보니까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사회복지를 공부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한 후에는 자신이 사는 지역에 노인들을 방문해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김순교: 목욕차를 차고 다니면서 어르신들 목욕을 해주고 있습니다. 차 안에 물을 덥혀서 목욕할 수 있게 침대 욕조 설비가 돼있습니다.
기자: 차안에서 몇 분이나 목욕을 할 수 있습니까?
김순교: 한명씩 목욕 하는데 우리 고객을 찾아다니는데 하루 한 6명 하고 있습니다.
기자: 혼자서는 거동이 불편한 분들이군요.
김순교: 네, 치매있는 분들...여성 영양보호사와 함께 다니는데 여성분이 목욕을 할 때는 그 여성이 돕고 남성이 할 때는 제가 하고 그렇습니다.
남한에서 같은 북한여성을 만나 가정을 꾸렸습니다.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문제 즉 생활은 목욕차를 운행하면서 생긴 수입으로 충당합니다. 이렇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낮에는 일하면서 저녁에는 신학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하루 일과를 보면 빽빽한 것이 여유가 없어 보이기까지 한데요.
김순교: 하루 일과는 아침 5시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6시 새벽기도를 갔다가 출근합니다. 그리고 내가 맡은 차의 물을 덥히고 나면 7시 40분 되는데 그때부터 목욕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5시 일 끝나고 신학공부하는데 가서 공부하면 9시에 끝납니다. 그리고 집에 오면 9시 40분 정도 됩니다. 토요일 일요일은 휴식합니다.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어 신학을 공부하게 됐고 이제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게 됐습니다. 김 씨는 봉사에도 열심인데요. 목욕차를 몰지 않아도 되는 주말에는 양로원을 방문해 허드렛일 돕기를 2년째 하고 있습니다.
김순교: 여기 오니까 우리 사람들이 받는 것에만 익숙해서 감사를 모릅니다. 관심받기 원하고, 사랑받기 원하고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볼 때 감사하는 마음을 알면 정착하기도 쉽겠다 해서 봉사단체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그 같은 해에 남한사람과 탈북자가 같이 종교 생활하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지금 사역하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자 김순교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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