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많은 수의 탈북민은 남한에 가서 자신이 북한출신임을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자칫 좋지 않은 선입견으로 불이익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입니다. 오늘은 내일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 김은혜(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은혜: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이 안에서 살려면 운명을 받아들이고 살라고요. 그런데 언니의 결혼이 성분 차이 때문에 잘 못 되는 것을 보고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저는 탈북했어요.
김 씨가 고향을 떠났던 것은 고난의 행군 시절 먹고 살기 위한 생계형 탈북이 아닙니다. 그의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부터 고통을 받은 적대계급에 속해있었고 그런 현실을 벗어나고자 했던 겁니다. 김 씨의 첫 탈북은 1998년이지만 중국에서 강제북송당해 북한에서 고초를 당했고 그 후 2005년 재 탈북에 성공해 다음해 남한으로 갑니다.
기자: 2006년에 한국에 도착했을 때 느낌이 어땠습니까?
김은혜: 솔직히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냐면 우리가 북한에서 남한에 대한 교육을 많이 받았잖아요. 그런데 그 교육의 정반대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어요. 중국에 있을 때는 텔레비전을 보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진짜일까? 약간 거짓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직접 보고서는 너무나 놀랐고 인천공항의 웅장함에 놀랐고 한국에 도착해서 물질의 풍요를 보면서 이것이 진정한 자유구나 하는 생각했죠.
28살 탈북민의 눈에 보이는 모습은 천지개벽이었고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북한과 비교 대상이 됩니다.
김은혜: 어느 길을 가던 가게가 있고 물건이 있고 식당이 있고 어디가나 돈만 있으면 못살 것이 없잖아요. 그런데 북한은 물건을 팔때도 사람들이 절대 전부 내놓고 파는 것이 아니라 통제하에 더러는 감추고 판매를 하거든요. 여기서는 돈만 주면 뭐든 살수 있고 거래를 할 수 있는 이런 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 바쁘게는 살아가지만 스스로 돈을 벌어서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것을 보면서 이렇게 사는 삶이 얼마나 좋은가 여기서 태어난 사람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어요.
20대의 북한 젊은이가 남한에 가면 대다수가 대학진학을 합니다. 짧게는 2년 보통 4년 기간을 대학에 다니면서 남한 사회를 알아가지만 김은혜 씨는 달랐습니다.
김은혜: 저는 대학을 갈 생각을 당시에는 안했습니다. 나도 이 사람들처럼 살아야겠다. 탈북민이란 정체성을 감추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주류사회에 동화돼서 살아가려면 아예 모든 탈북민과의 관계를 끊고 여기 사람들의 모습을 모방하고 말투를 배우고 이런 것을 처음에는 추구했죠.
기자: 대학을 안 가고 회사 생활을 했다는 건가요?
김은혜: 네, 학교를 안 가고 회사에 다니면서 돈을 벌고 일하면 일한만큼 돈을 받으면서 돈이 모이는 재미가 행복이다 생각했죠.
기자: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하기 어렵다고 하는 데 어떤 회사에서 무슨일을 하신겁니까?
김은혜: 우리 탈북민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기술직이나 사무직에 못가는 거죠. 배운 것이 없으니까요. 전자제품 핸드폰 만드는 데서 검사도 하고 앞에 액정 만드는 곳에 가서 몇 년 동안 일을 했습니다.
김 씨가 말하는 것처럼 그가 한 일은 전문 기술이나 일정 학력을 요구한 일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땀흘려 일하고 그에 따른 보수를 받는 기쁨이 컸지만 시간이 지난 후 더 나은 일을 하기 위해 미래를 위한 투자 즉 대학진학을 하게 됩니다.
김은혜: 처음 1학년은 너무 힘들었어요. 대학도 경쟁이라 20대 친구들과 경쟁하면서 제가 30대에 가서 공부하자니 너무 힘들었어요. 나이가 있는 사람이 바닥을 길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친구들보다 배는 노력한 것 같습니다.
기자: 어떤 것을 전공하셨는데요?
김은혜: 제가 중국어와 정치외교학을 복수전공했습니다.
기자: 대학을 졸업하고는 생활이 바뀌었습니까?
김은혜: 생각이 바뀌고 인식이 바뀌었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돈이 전부가 아니고 자본주의 세상도 사람들과 어우려저 사는 세상이다. 어린 친구들에게 뭐 배울 점이 진짜 많다. 전에는 어린 친구들에게 뭐 배울 것이 있겠는가? 나이먹은 사람들한테 배울 것이 많겠지 이런 제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전부 깰 수가 있었습니다.
대학 졸업장이 더 나은 생활을 보장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예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을 깨닫되고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변한겁니다.
김은혜: 제가 좀 사람들한테 약간 차가운 면이 있는 것이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제 스스로 사람들을 용서할 줄도 알고 약간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관대할 줄 알아야한다. 또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어요.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을 요즘 너무 느끼면서 …한 5년 동안은 돈만 벌고 돈을 모으는 재미가 있었어요.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으로 생활하고 필요한 것을 구매하고 그런 것이 좋았고 북한의 가족과 통화를 하면서 돈도 보내줄 수 있는 것이 좋았어요. 그래서 당시는 아무것도 안 하고 돈만 벌었던 것 같습니다.
기자: 10년 남한 생활이지만 모든 것을 집중한 세월이어서 굉장히 빨리 시간이 갔던 것 같아요?
김은혜: 그러게요. 저도 어느새 나이가 이정도가 됐는지 돌이켜 보면 정말 바쁘게 산 것 같습니다. 기자: 대학 올해 졸업하고 한 것은 뭔가요?
김은혜: 제가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통일강사 활동을 했습니다.
지금은 북한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통일, 북한의 사회 문화 언론 등 북한에 대해 더 깊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통일강사일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통일강사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북한의 현실을 남한 사람들에게 바로 알려주는 직업입니다.
김은혜: 요즘 저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 통일 강의를 나가고 있어요. 나갈 때마다 오히려 제가 힘든 것 보다 힐링을 하고 온다는 생각이예요. 그게 행복이 아닐까 생각해요. 왜냐하면 나가서 그 친구들에게 한마디 한마디 통일에 대해 말할 때 오히려 위안을 얻습니다. 그 어린 친구들에게 통일을 해야 하나요 하고 물어보면 통일을 해야합니다. 북한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북한 구경을 하고 싶고 우리가 배낭을 메고 유럽까지 자유롭게 하는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말을 많이 듣고 있거든요.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탈북민의 한 사람으로서 통일 강의를 사명감 때문에 했는데 나한테 이것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 일까지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어요.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통해 경제활동을 하며 개인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김은혜 씨는 북한으로 말하면 준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자신이 탈북민이기 때문이랍니다.
김은혜: 솔직히 저는 5년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못했다가 과거에 잊고자 했던 과거 강제적으로 지웠다고 생각하고 내 삶에 충실하고자 했는데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면서 탈북민들의 아픔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고 나는 배워서 내 가족을 지키고 또 중국이나 제3국에서 떠도는 탈북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고 그래서 대학에 갔고 나는 꿈이 있어요. 통일이 됐을 때 고향사람들에게 나도 통일이 될 때까지 노력했다고 떳떳하게 나서고 싶고 통일 후 남북갈등 해소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어서 생활면 보다는 공부를 더 하는 삶을 살게 됐습니다.
행복이란 그것을 말하는 사람마다 그 정의가 다를 겁니다. 김은혜 씨가 생각하는 행복은 뭘까?
김은혜: 자기가 추구하는 꿈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행복이라고 하고 건강을 행복이라고 하는데 저는 꿈으로 한발짝 한발짝 다가서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민 김은혜(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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