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살아 있을 때 성취하기 힘든 일은 허망 하다고 합니다. 그래도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과연 이뤄질까하면서도 보통 사람들은 소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은 꿈을 현실을 바꾸고 있는 꿈 많은 청년 김필주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필주: 북한에 있을 때는 제가 17살로 2001년이었으니까 고난의 행군이 막바지에 있기는 했지만 앞날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고 언젠가는 굶어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어머니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게 됐습니다.
김필주 씨는 17살까지 북한에 살면서 북한이 그렇게 못사는 정도면 다른 나라는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특히 남한은 너 심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외부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일부러 외면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알수가 없었던 거죠. 살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는데 건너편 중국땅에 도착했을 때 김 씨는 비로서 북한 밖의 세상을 알게 됩니다.
김필주: 얼마나 잘사는지는 상상을 못했죠. 그냥 가보자 해서 강을 건넜는데 패트병 사건은 북한에 있을 때 술 심부름을 많이했는데 내가 살던 곳은 겨울에는 얼음판하고 동네 골목길을 구분하기 어려웠어요. 전기가 없는 도로에서 얼음판을 다니다 보면 자주 넘어져 술병을 깨는 일이 자주 있었어요. 술병 값어치가 성인 5명이 한끼를 먹을 수 있는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돈이었는데 얼마나 속상했겠어요. 그때 한이 맺했었죠. 세상에 안 깨지는 병이 나한테 하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는데 그것이 세상에 존재했고 그것도 모자라 쓰레기로 굴러다니니까 …그때 저에게는 충격이었고 잊지 못할 순간이었어요.
집에서 키우는 가축도 쌀밥을 먹고 사는 현실. 북한과 비교할 수 없이 물자가 넘쳐났던 중국이었지만 그에게 중국은 목숨을 연명할 수 있게는 해줬지만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세상이었답니다.
김필주: 북한이 1지옥이고 중국이 2번째 지옥. 일단 중국에서의 삶을 얘기 하자면 아침에 일어나면 어젯밤에 잠들었던 그곳이 맞았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하루일과를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언제 잡힐지 모르는 신분인 탈북자로 살았기 때문에 잡힌다는 것은 북송을 말하고 그러면 감옥에 가게 되고, 감옥에 간다는 것은 그나라에서 인간취급을 못받는 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이 다 연관이 돼 있는 것이었죠. 그래서 4년동안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매일 같았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확인하는 것은 철창이 있는 감옥이 아닌지 어젯밤 잠들었던 그곳이 맞는지 그것이 확인되면 안심하고 하루일과를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한국 사정에 대해 듣게 됐고 탈북자가 가면 정부에서 정착금도 대학도 보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2006년 봄 한국땅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김 씨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맙니다.
김필주: 그게 태어나서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어요.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몽골 울란바트로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는데 탑승전까지 엄청난 공포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죠. 마지막 관문이잖아요. 이제 한국땅에 도착해 자유를 찾는가 아니면 이대로 잡혀서 돌아가 죽느냐 이 문제 앞에서 기다리다 보니까 두려움이 배가 됐는데 비행기가 이륙하고는 안심을 했고 처음 타보는 비행기고 한국에 가는 방향이고 하니까 설레고 그 기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어요. 그래서 막 신나게 떠들고 있는데 거의 한국에 도착하면서 갑자기 승무원의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그게 한국말이었어요. 그 목소리를 다 알아들을 수 있었어요. 그 전에는 중국말, 영어 이런 것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시간이 4년 이상이었는데 너무 익숙한 소리를 들으면서 갑자기 내 몸이 반응한 것이 눈물이었어요. 속 깊은 곳에서 핵 같은 것이 쭉 올라오는 느낌이었고 그게 머리까지 전달되면서 그것이 눈물로 표출됐는데 기쁨의 눈물, 설움의 눈물, 감격의 눈물 이런 것을 모두 포함한 눈물이었던 것 같아요.
설명하기 힘든 눈물을 흘리며 김 씨는 새로운 희망을 봅니다.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 일한만큼 그 대가를 지불받는 것이 자본주의사회 한국이다. 이런 단편적인 지식이 힘이 됐습니다. 그리고 젊은 탈북민 청년이 선택한 것은 대학진학인데요. 사회에 나가 집을 배정받고 바로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꿈은 2년 뒤에 현실이 됩니다.
김필주: 바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북한에서의 저의 학력은 중학교 2학년 중퇴고 여기로 보면 초등학교 6학년 중퇴였어요. 학력을 인정 받아야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고 해서 검정고시를 보고 준비를 해서 한국 외국어대학교 중국어를 전공했습니다. 중국어를 선택했던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알게 된 것은 배우고 싶은 것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을 해야한다 그것을 찾다보니 없었고 그나마 중국에서 살았던 이유로 말을 할 수 있어서 중국어를 전공하게 된거죠.
공부를 하고 싶었고 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순조롭게 이 모든 것이 착착 이뤄집니다. 이런 변화는 주변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게 체격도 좋아졌습니다. 탈북민은 보통 남한사람보다 체격이 작은데 김 씨는 겉으로 봐서는 차이를 못느낄 정도가 됐답니다. 김필주: 그게 17살 때까지 내 키가 153센티였어요.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반에서 제일 컸거든요. 그런데 지금 170센티인데 중국에 넘어와서 키가 크기 시작한거죠. 중국에서 키가 크기 시작한 것이 1-2년만에 그렇게 큰거예요.
기자: 먹는 것이 달라져서였을까요?
김필주: 조건이 딱맞았던 거죠. 일단 마지막 성장판이었고 크려고 하는데 영양분이 부족했는데 그게 해결된거죠. 그리고 북한에서는 일만 했는데 중국에서는 숨어사는 신분으로 먹고 자고만 했던거죠. 여러 조건이 맞아서 그렇게 클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꿈 많은 탈북민 청년 김필주 현재는 북한인권활동가로 북한의 현실을 알리며 내일의 또 다른 모습의 변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김필주: 청년나눔팀장으로 변경을 했고 올해말까지만 남북동행에서 북한인권활동을 할 예정이고 내년부터는 카톨릭대학교 심리학과에 다시 진학합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꿈 많은 청년 김필주 씨가 남한에 정착하기 까지 얘기를 전해드렸는데요. 다음 주에는 그의 대학생활 중에 연극 배우로 활동한 이야기와 남한에서 경험한 웃지 못할 실수에 대해 전해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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