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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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큰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 때는 고마움이란 단어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절망의 순간 또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할 때는 주변의 작은 베품에도 감사함을 느끼게 되고 고난을 극복하는 순간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오늘은 40대 초반의 탈북여성으로 딸과 함께 남한생활을 하는 박은지(가명) 씨의 얘기입니다.

박은지: 꿈을 꾸는 것이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꼭 복지 일을 하고 싶어요. 그건 변함이 없어요.

남한에서 배운 학문을 언젠가는 북한에 가서 꼭 펼쳐보고 싶다고 말하는 박은지 씨. 그는 함경북도 출신으로 고난의 행군 때 국경을 넘어 살길을 찾습니다. 박 씨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남한으로 간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박은지: 제 나이 28살에 북한의 정치가 나빠서 또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배가 고파 나왔어요. 중국에서 10년 가까이 살았어요. 중국에서도 공안원에 쫓기다 보니까 집에서 지낸 시간은 별로 안 되거든요. 숨어 지냈기 때문에요. 그런데 딸아이를 데리고 어느 날 공원엘 갔는데 돌부처 앞에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엄마와 헤어지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 비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잡히면 북한에 나가 내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장사를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딸아이가 하는 말을 듣고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 한국행을 택했어요.

늘 쫓겨 다니며 불안한 모습을 보며 살던 어린 딸은 본능적으로 언젠가는 엄마와 헤어야할 운명이란 것을 알았던 겁니다. 엄마와 헤어지기 싫다며 간절히 소원하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박 씨는 한국행을 결심했고 어린 딸과 함께 새로운 땅 남한에서 다시 인생을 시작합니다.

박은지: 처음에는 식품회사에서 창고관리까지 하면서 한국 전역에 있는 매장에 물건을 보내주는 일을 한 2년 넘게 했어요. 컴퓨터도 다룰 줄 모르면서 했어요. 사장님도 일 잘한다고 했어요.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일하러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아이를 키우다 보니까 한국 사회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이 많았어요. 그래서 복지공부를 했는데 공부를 하다보니까 한국에 너무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남한에서 사무직에서 일하자면 기본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해 문서작업을 하고 전자우편을 통해 각 지역의 사업장과 일을 진행해야합니다. 하지만 박 씨에게 컴퓨터는 너무도 생소했고 남한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생활용어들 조차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어린 딸에게도 똑같이 찾아왔는데요.

박은지: 아이가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아이 친구를 보면 병원 원장 딸도 있고 하니까 아이가 탈북자라는 것을 말을 안 해 모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아이도 한국말을 못하니까 막 울고 했거든요. 그때는 퇴근해서 아이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어울리게 했거든요. 학부모들을 만나서 얘기를 하니까 아이가 중국어를 어디서 따로 배웠냐고 묻더라고요.

박 씨와 달리 아이는 중국에서 태어났으니 탈북자는 아니고 중국이 고향인 셈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또 엄마가 탈북자라고 친구들에게 말하기도 껄끄러웠던 겁니다. 그래서 엄마는 강원도가 고향이고 자기도 시골에서 살다가 도시로 이사 온 것처럼 하면서 지냈던 거죠. 박 씨는 아이가 더 크기 전에 뭔가 변화가 있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둡니다.

박은지: 2년을 살아보니까 어느 정도 알아야 아이를 교육시킬 수 있겠더라고요. 아이 학교에서 봉사한다고 하면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아이가 나중에 사회생활을 하자면 봉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죠. 인터넷을 검색해도 봉사활동을 다녀왔다고 하는 말은 있는데 봉사가 정작 뭔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직장을 그만 두고 학교에 입학했어요.

남한에 가서 식품물류센터에서 첫 직장생활을 2년간 하다가 전문대학에 진학해 사회복지란 과목을 배우게 됩니다. 복지란 쉽게 말해서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이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일이나 그와 관련한 정책 등을 말합니다. 이런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면서 박 씨는 서서히 남한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박은지: 자본주의가 좋다고 느낀 것은 표현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제가 직장에서 탈북자라고 하면서 소개를 하면 좀 거리를 두는 분도 있지만 어떤 분은 내 손을 잡으면서 정말 고생 많았다고 북한에서 정말 사람들이 굶고 그러냐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분도 있거든요. 2년 동안 공부를 하고 졸업하고는 복지시설에 취업을 해서 2년을 일했어요. 일하는 것은 너무 즐거워요. 그런데 몸이 안 따라주는 거예요.

남한생활 7년차가 되면서 박 씨는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는 자신만 열심히 하면 남부럽지 않게 잘 살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젠 환경이 허락을 해도 몸이 말을 안 듣게 된 겁니다.

박은지: 남쪽 생활이 자기만 열심히 일하면 살 수 있으니까 너무 좋아요. 그런데 북한에서도 식량배낭을 메고 다니고 해서 오래전부터 뼈가 퇴화가 되면서 작년부터는 온몸을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아요.

노동에는 장사가 없다고 북한에서 그리고 중국에서 그동안 너무 심하게 육체노동을 해서 실제 나이는 40대 초반인데 뼈와 뼈 사이의 인대는 전부 닳아서 너덜거리게 됐고 움직일 때마다 뼈끼리 부딪치면서 염증까지 생기게 된 겁니다. 그래서 더 억울한 마음도 들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또 다시 딸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용기를 내서 일어설 것이라고 믿습니다.

박은지: 북한에 대한 생각이 나서 울음이 북받쳤어요. 지금 몸도 망가지고 하니까 너무 서러워서 그래요. 한국에 와서 일을 너무 하니까 입술에 물집이 잡히고 하면서 그 자리가 낫지를 않아요. 지금도 그렇거든요. 그렇게 살았는데 이제 하고 싶어도 일을 못하니까 억울하죠. 앞으로는 병원에서도 무리하지 않고 어깨를 쓰지 않으면 된다고 하니까 희망을 갖고 있어요. 오늘 아침에도 아이 학교 보내면서 해준 말이 있거든요. 딸아 오늘도 최소한 두 명 한테는 고마워, 사랑해 이런 말을 꼭 하고 오라고 그런 말을 해주고 보냈거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박은지(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