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통해 다시 우뚝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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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은 탈북민 3만명 시대가 됐습니다. 북한을 탈출해 남한에 간 주민은 남한정부의 지원과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각자 자신의 미래를 개척합니다. 그러나 그 길이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연극 무대를 통해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꿈 많은 청년 김필주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함경북도 새별군 두만강이 보이는 동네에 살다가 굶어죽는 게 무서워서. 2001년 탈북했다는 김 씨. 그는 중국에서 강제북송과 재탈북 그후 중국에서의 4년 생활을 거쳐 2006년 한국 땅을 밟습니다.

열심히 새로운 세상에서 멋지게 살고 싶었던 김 씨는 대학에 다니며 현실의 높은 벽에 부딪치게 됐고 심한 정신적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절박한 순간에 연극을 하게 됐는데요.

기자: 연극이 매력적인면도 있지만 경제적으로 생활보장이 힘겨워 어떤이는 힘들어 하면서도 끊지 못하는 것에 비유해 연극을 마약이라고도 하는데 어떻게 연극을 하게 됐어요?

김필주: 학교를 졸업하고 연극인으로 취업한 것이 아니고 대학교 3학년 1학기에 진로 문제로 깊은 방황을 하면서 대학을 자퇴 하고 그 방황의 끝자락에서 자살을 생각하다가 죽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 싶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잡았던 것이 연극이었습니다.

남한에서 일반화 된 이야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연, 지연, 혈연 즉 같은 학교를 다녔거나, 같은 고향 출신이거나 친척관계에 있는가를 따져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관계를 중요시 합니다. 그런면에서 김필주 씨는 해당사항이 없었고 철저히 실력 하나로만 승부를 걸어야 했는데 그것이 막막했던 겁니다. 좌절의 시기에 연극을 하게 됐고 이는 다시 김 씨를 일어서게 만듭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총 5개 작품에 출연합니다.

기자: 배우로 무대에 설 때 김필주 씨는 어떤 인물입니까?

김필주: 내가 북한의 실태를 알리고 본의 아니게 탈북자를 대변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북한을 잘 모르는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을 알린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김 씨가 출연한 작품들은 탈북민이 남한에 가서 새로운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 일 수도 있습니다.

김필주: '정명'은 내가 처음 출연했던 작품이었고 두번째는 '이중사연'이라고 해서 '정의의 사람들'이란 작품이 있는데 이 내용을 각색한겁니다. 가상의 현실이지만 탈북자들이 테러단을 만들어 북한정부에 반항하는 무거운 내용을 담은 것이어서 이보다는 가볍게 가자 해서 만든 것이 이중사연입니다. 이 작품은 한 탈북자가 한국에서 10년 정착생활을 하면서 저녁에 하는 대리운전 기사를 하면서 겪은 인간적인 이야기를 담은 겁니다. 세번째는 '오작교'입니다. 이 작품은 최대한 북한 문제를 가볍고 현실적으로 다가가자 해서 남남북녀의 사랑 이야기로 완화 시켜서 그 속에 탈북자의 정서, 심리 등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담아 만든 것이고 네번째는 이중사연을 조금 각색을 해서 만들었고 다섯번째는 오작교를 조금 더 각색을 해서 이렇게 다섯 작품을 했습니다.

기자: 그러면 작품에 출연만 한 것이 아니고 극작도 하신 겁니까?

김필주: 아니요. 대본은 전문가분이 소재를 말하면 써주셨고 제가 한 것은 기획을 한 겁니다. 연극이란 것이 돈이 있어야 하는 거니까요. 민간단체에서 연극을 만들자면 북한인권 활동을 하면서 돈이 없으니까 국가보조금을 받아 하는 겁니다. 국가보조금을 받는 조건이 이런 기획안을 써서 심사를 통과를 해야 돈을 받는 것이니 그런 기획안을 쓰는 작업을 한 겁니다.

김필주 씨가 처음 역할을 소화한 '정명' (정의로운 목숨) 부제는 어항을 나온 물고기입니다. 김 씨는 남한 인터넷 방송 '배나 TV'에 출연해 작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잠시 회견 내용 들어보시죠.

김필주: 내면에서 그런 분노를 연극에서 대리만족 시켰어요. 그리고 대사 중에 그런 것이 있었어요. 사람이 굶어 죽는 것을 본적이 있느냐고 나는 수도 없이 봤고 그것을 보면서 이날 이때까지 그 한으로 내가 살아왔는데 너는 뭣 때문에 어떤 감상에 휘말려서 이렇게 나약한 모습이야 그럴꺼면 나가! 이런게 있는데 실제로 내 옆에서 굶어 죽는 아이를 봤거든요. 그게 13살 때인데 북한에서 꽃제비 생활을 한 6개월 했어요. 거기서 공개처형도 보고 내 옆에서 어린 여자 아이가 굶어죽는 것도 봤고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목숨은 붙어 있는데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파리가 먼저 알아봐요.

사람 몸에 액체가 흘를 수 있는 눈, 귀, 코, 입, 항문까지 파리가 새까맣게 달라붙어요. 죽을 때는 몸에서 냄새가 나잖아요. 파리가 먼저 냄새를 맡고 달라붙어요. 난 그 아이 몸에 파리가 달라붙으니까 더럽다고 죽을 때가 됐는지 나는 모르잖아요.시장에 주워 먹으로 나가야 하는데 "오빠 나 배고픈데 힘들어서 못 나가겠어" 그래서 집에서 그냥 쉬어 하고 난 장마당에서 뭐 좀 주어 먹고 공개처형도 보고 꽃제비 집결소에 돌아와 자려고 하는데 아무개가 오늘 죽었다는 거예요. 그런 경험을 했던 것을 대사가 있으니까 몰입이 너무 되는 거예요.

남한은 출신성분이나 토대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는 사회가 아닙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도 각종 이권이 결부되면 학연이나 지연 등을 찾게 되지만 좀 과장되게 말해 실력이 있으면 성공하는 경쟁사회입니다. 이렇게 기자가 장황하게 말하는 이유는 김 씨는 20대에 남한에 간 북한출신으로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며 혼란기를 넘어선 후 정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초창기 서울 생활을 떠올리면 얼굴을 화끈거린 답니다.

김필주: 서울에는 지하철이 1호선부터 9호선까지 있는데 저는 2호선을 자주 탑니다만 2호선은 순환선입니다. 한국에 와서 하나원에서 3개월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왔습니다. 나와서 며칠있다가 병원에 갈 일이 있어서 볼 일을 보고 집에 가려고 순환선을 탔는데 3바퀴를 돌았습니다. 한바퀴 도는데 1시간 반이 걸리니까 3바퀴돌면 어느정도 시간이 걸리는 가는 짐작이 될겁니다. 한마디로 해가 떠있을 때 집을 나왔다가 해가 지고 어두 컴컴한 밤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순환선을 타고 빙빙 돌았던 거죠.

기자: 자기가 내릴 역을 깜빡한 거군요?

김필주: 깜빡한 것이 아니고 계속 보고 있었는데 제가 살고 있는 곳은 같은 2호선이지만 짧은 간선으로 갈아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니까 그리고 물어보면 되는데 탈북자이고 말투가 서울 말투가 아니라 두렵고 해서 한바퀴 돌고 들어가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한바퀴 돌았는데도 또 돌기에 두번 돌고 들어가나? 이렇게 하다보니 세바퀴 돌다보니까 두려워서 결국 물어봐서 들어갔던 사건이 있어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그리고 인터넷 방송과 연극무대를 통해 북한의 현실을 알리는 김필주 씨. 그에게는 북한인권활동가, 탈북민 연극배우, 대학생 등 자신을 소개하는 수식어가 있지만 그가 남들에게 불려지길 원하는 말은 꿈많은 청년 김필주랍니다.

김필주: 제 꿈은 청소년들을 위한 심리 상담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정서를 지키는데 제 경험과 삶을 받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들이 우리 미래를 잘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하고 싶어서 청소년 상담사가 되는 것입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꿈 많은 청년 김필주 씨가 연극 배우로 활동한 이야기와 남한에서 경험한 웃지 못할 실수에 대해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