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정착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북한출신 주민의 이야기. 오늘은 서울에서 호텔 주방장이 되기 위해 뒤늦은 나이에 열심히 공부하는 탈북자 박광일(가명)씨와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는 탈북자 최은석(가명)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14살 때 탈북해 강제북송과 재탈북의 생사의 고비를 수차례 넘긴 탈북자 박광일 씨. 어느덧 세월이 흘러 29의 나이가 됐는지만 그는 현재 남한에서 중학교 졸업인정을 받기 위한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보통 남한 사람이 거치는 과정을 박 씨는 10년이 늦은 나이에 뒤늦게 시작한 겁니다. 학력은 박 씨가 남한에서 일류 호텔 주방장이 되기 위한 준비 중 하나 입니다.
박광일: 한국에서 한식, 중식, 일식 요리사 자격증을 3가지를 땄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신라호텔에 문서를 넣었는데 1차에는 합격했는데 2차에서 떨어졌습니다. 내가 왜 떨어졌는가 하고 물어봤더니 중학교 중퇴로 학력이 돼 있어서 학력미달로 떨어졌습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호텔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학력 때문에 떨어져서 자존심이 상하는데 그래서 대학까지 나와서 다시 호텔에 지원하려고요.
1990년대 말 재탈북에 성공했던 박 씨는 말도 통하지 않았던 중국에서 밑바닥 생활에서부터 출발해 그가 일했던 식당의 주방장 위치에까지 오릅니다. 그가 일했던 곳은 상해에 있는 큰 식당이었는데 한곳에서 8년간 한결같이 일한 성실함이 인정을 받았던 겁니다. 하지만 북한출신이란 불안은 늘 박씨를 따라다녔고 이미 남한에 안착했던 가족이 박 씨에게 남한행을 권해 박 씨도 중국 생활을 청산했습니다. 박 씨는 중국에서는 작은 성공을 일궈냈었다며 힘들었지만 보람 있던 당시의 생활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박광일: 말을 몰라서 그릇만 날았습니다. 그때 내가 월급 받은 것이 300백 원(한화 15만 원)씩 받았습니다. 그렇게 시작해서 마지막 나올 때는 중국 돈 8천 원을 받았습니다. 한국 돈으로 하면 600만 원 정도 됩니다. 한국에서는 적은 돈이지만 중국에선 큰돈이거든요.
남한 돈으로 600백만 원이면 미국 달러로 환산해서 5천 달러가 훨씬 넘습니다. 월급으로 5천 달러가 작다고 말하는 박 씨는 남한에서 일류 호텔 주방장이 받는 월급은 1,700만 원 미화로 1만 6천 달러가 된다면서 언젠가는 자신도 일류 호텔 주방장이 되기 위해서 꼭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했습니다.
박 씨가 남한에 산 기간은 이제 1년 반이 됩니다. 그동안 잠시 일도 해봤고 남한에서 인정하는 요리사 자격증도 3개나 취득했습니다. 지금은 대학 진학을 위해 같은 처지에 있는 탈북자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시설인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박 씨는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자본주의 세상을 아는 데도 적잖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습니다.
박광일: 북한 사람들이 대한민국 올 때 좀 착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고요.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줄만 알았습니다. 법이 있다는 것. 잘못하면 벌금 내야하고 그만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가면 쓰고 마음대로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법이 따르지 세금이 따르지. 중국에서 150만 원 받기로 하고 일했다 하면 월급날이면 150만 원 그대로 주거든요. 그런데 대한민국에선 세금을 빼고 주니까 150만 원 돈이 안 나오더라고요. 저는 북한 법도 모르고 한국 법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을 해주니까 설명을 해줘도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아직은 낯설고 어색한 것이 더 많은 남한에서의 생활. 그는 꿈이 있고 앞으로의 계획이 다 서 있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거나 망설일 시간조차 없다고 했습니다. 박 씨가 뒤늦게 공부를 해야 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얼마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기도 합니다.
박광일: 공부하는 것은 힘들죠. 엄마 살아 계실 때 제가 어릴 때 공부를 못 시켜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공부 하라고 했습니다. 중국에서 고생했거든요. 말은 모르지 요리도 머릴 쓰면서 해야 하는데 머리도 따라가지 못하니까 중국 사람한테 천대를 많이 받아서 요. 북한에서도 인정 안해주고 중국에서도 인정 안 해줬지만 대한민국에선 꼭 인정받고 싶습니다.
(브릿지 음악)
청진이 고향인 탈북자 최은석 씨는 올해 만으로 28살입니다. 북한에서는 바닷가에서 수산업 일꾼으로 일했지만 지금은 남한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남한 생활도 이제 4년 정도 되면서 어느 정도 자본주의 사회가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최은석: 내가 생각하는 대한민국은 좋은 나라입니다. 북한에 있었다면 별다른 것을 했겠습니까 여기 왔으니 대학도 가고 성취감도 있는 것이지요. 배움을 통해 더 폭넓게 세상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살 때는 출신성분 때문에 그리고 가정 형편상 대학진학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젠 벌써 졸업을 앞두고 취업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남한에서는 자기만 열심히 하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대학에서도 제일 우수한 학생이 되겠다고 생각했고 자신도 있었지만 기본이 없이 시작한 공부가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최은석: 솔직히 여기 친구들보다 잘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대학엘 갔는데 막상 가보니까 이 친구들은 정규 교육을 받고 들어와서 기본 바탕이 잘돼 있고 전 검정고시를 통해 들어와서 힘들었죠. 하지만 나름의 경험이 있으니까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잘하자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같이 어울리고 소통하면서 문화적 차이, 지적 차이를 좁혀 가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탈북자가 남한에서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는 서로 다른 문화에서 살았기 때문에 오는 이질감입니다. 최 씨도 남한생활 초기에는 같은 말을 쓰는 남한 사람들에게 섞이지 못하고 마음고생도 있었지만 세상 어딜 가나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이유도 없이 선입견 때문에 거리를 두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즉 마음의 문을 열면서부터 학교생활에 대한 적응도 빨라졌습니다. 이미 힘든 고비를 여러 차례 겪었기에 마음이 담대해진 까닭일지도 모릅니다.
최은석: 지금도 취업 준비를 하는데 살다 보니까 자꾸 생각이 변하더라고요. 처음엔 공부도 열심히 해서 투자에 관심이 있고 하니까 은행이나 증권사를 생각했는데 현실을 보니까 영어가 800점 이상 돼야 하고 학점도 4.0 이상 돼야 하고 하는데 성적이 잘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그것만 생각하지 않고 남한에서도 북한에 관심이 있는 기업을 택해서 간다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대학을 안 나온 사람도 취업 되잖아요. 항상 오늘에 충실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자신의 꿈을 키워가는 탈북자의 이야기를 전해 드렸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