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고향] 부산의 탈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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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정착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북한출신 주민의 이야기를 탈북자의 지역사회 정착을 돕는 기관인 하나센터 관계자를 통해 들어보는 ‘제2의 고향’ 시간입니다. 오늘은 인구 350만 명의 해양수산도시인 부산광역시 편입니다.

남한의 수도는 서울입니다. 대통령의 직무실이 있는 청와대가 있고 정부 청사는 물론 외국 공관이 밀집한 곳입니다. 그리고 부산광역시는 남한에서 제2의 수도로 손색이 없을 만큼 인구 면에서나 경제 규모 면에서 주목받는 곳입니다. 남한의 동남쪽에 있는 해양수산도시로 부산은 예전부터 국제적 항구도시로도 알려진 곳입니다.

부산에 거주지를 배정받은 탈북자는 부산 YWCA 즉 기독교여자청년회 부설 새터민지원센터 그리고 같은 건물에 있는 하나센터에서 지역사회 정착교육을 받고 그밖에 생활하면서 경험하는 불편함에 대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센터 김경연 씨에게 부산에 사는 탈북자 현황부터 들어봅니다.

김경연: 저희 최근 통계를 보면 781명으로 돼 있는데 이건 작년 12월까지 통계입니다. 올해도 계속 오셨으니까 저희는 800명이 넘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제일 많이 거주하는 지역은 사하구, 해운대구, 송정과 반송 순입니다.

부산에는 매월 10여 명 안팎의 새로운 탈북자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남한 지역과 마찬가지로 최근 들어가는 탈북자는 주로 이미 부산에 정착한 탈북자가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을 부르는 형태여서 가족 입국이 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탈북자는 정부에서 주는 임대아파트를 받을 때 가족 수에 따라 다른 평수의 집을 받습니다. 북한의 가족을 불러 갔을 때는 아무래도 멀리 떨어져 살기보다는 가까운 거리에 집을 받아 살기를 원할 텐데 그에 대해서도 최대한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해 문제를 풀어가고 있다는 것이 김 씨의 설명입니다.

김경연: 안 그래도 이번에 오신 분 중에 혼자 살 때는 13평이 괜찮았는데 가족이 3명 오면서 총 4명이 되면서 거기에 살기엔 너무 좁아서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신청한 상태입니다. 가족이 늘면 집을 옮길 수 있습니다.

부산에서는 지역에 따라 배정받는 아파트의 평수는 조금씩 다른데 단독이라도, 약간 부산 외곽 지역인 기장이라는 곳은 대부분 최근에 지어진 아파트로 이곳에 배정받는 탈북자는 17평을 받고 있습니다. 가족이 오기 때문에 혼자 입국할 때보다는 서로 의지하면서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초기 정착이 이뤄질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과연 탈북자들은 남한에 가서 북한과 다른 모습에 제일 놀라워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의 행렬, 높게 솟은 건물들, 거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수많은 상점의 물건들 일 수도 있지만 탈북자들은 어둠을 밝히는 전기 사정에 입을 딱 벌린다고 합니다.

김경연: 일단 현대적으로 발전한 시설을 보면 놀라시고 문화체험이라고 있는데 부산 나들이 갔을 때 제일 신기해 하는 것은 부산에서 중심에 높은 산이 있는데 거기서 야경을 보시고는 놀라시더라고요. 북한은 밤이되면 캄캄한데 이렇게 네온사인이나 광안대교에 가로등 불이 켜져 있는 모습을 보고는 신기해하고 놀라고 그러시더라고요.

(부릿지 음악)

이번에는 부산에서 8년째 생활하면서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에서 매주 화요일 건강상담을 해주고 있는 강유 씨에게 남한생활에 대해 들어봅니다.

강유: 제일 고비는 와서 한 2년 동안이었는데 남한 정세를 몰라서 그랬습니다. 그때 참 힘들었습니다. 그 기간을 지나고 자본주의를 좀 이해하니까 나아졌습니다.

환갑이 지나 남한에 간 동의사 강유 씨. 중국에서 태어나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학업을 계속하려고 1974년 북한으로 유학을 갔고 함경남도보건간부학교를 나와 동의사 자격을 취득합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고향인 함경남도 홍원군 방돌리 진료소장이 됩니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 시절 중국의 친척에게 방조 받은 것이 간첩혐의로 둔갑해 감옥살이를 하게 되고 결국 병보석으로 나왔을 때 북한을 탈출하게 됩니다.

유창한 중국어 실력으로 중국에서 한의사 자격증을 취득해 의료활동을 하면서 5년에 걸쳐 북한에 남아 있던 가족을 모두 탈출시켰고 결국 남한행을 했지만 꿈을 안고 찾았던 남한의 시작은 좌절뿐이었습니다.

강유: 한의사는 자격증이 없어 안 되고 남한에서 대학을 나와야 된다고 하니까 억울했습니다. 북한도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헌법상에는 돼 있는데 정작 현실에서는 외국인 취급 받는 것이 안 좋았습니다. 의사 자격 인정을 못 받으니 다른 직업이라도 얻자고 생각하고 직업을 찾으니 아파트 경비직도 탈북자라고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2004년 8월 부산에 정착한 강유 씨는 한의사 국가 자격증은 없지만 부산을 시발점으로 남한 전역에 확산된 의료봉사단체인 ‘민중의술 살리기’의 초대 회장이 되면서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24살부터 시작한 의료 기술을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의료봉사단체 회원도 3년만에 4천여 명으로 늘었고 그의 활동은 다른 이들의 귀감이 됐습니다.

강유: 저는 의료자원봉사를 한 시간이 1,400시간이 됐습니다. 그래서 부산광역시 자원봉사 센터에서 상을 받았고 나중에 부산광역시에 보고돼서 표창장도 받고 했습니다. 자원봉사를 하면서 한국 사회를 더 잘 알게 됐고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까 어떻게 남한에서 살아야 될지 길이 보였습니다.

남한에서 세 명의 딸은 모두 출가를 했고 손녀도 봤습니다. 생활도 안정을 찾으면서 지난해에는 운전면허를 취득해 차도 장만했습니다. 승용차는 편해지기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봉사를 위해 장만한 것입니다. 아픈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강유: 지금까진 복지관 노인회관 등엘 갔는데 가만히 보니까 그 사람들은 노인들을 보살펴주는 데가 있지만 외딴곳에 있는 독거노인들은 한 번도 손길이 안 가는 분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저는 그런 사람을 대상으로 전국을 돌면서 자비로 봉사를 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북한으로 그리고 마지막 그의 인생을 장식하고 있는 남한의 부산에서의 생활. 강유 씨는 아직 자신에게 벌어진 나쁜 일들이 꿈이었다면 한다면서 고향 주민들이 걱정된다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대신했습니다.

강유: 지금은 빨리 통일이 됐으면 하는 생각이고 이번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땔감도 없는 북한에는 뭘 먹고 지낼까 그게 걱정입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의 부산광역시편이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