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고향] 북한의 현실을 증언하는 여성

중국 접경 신의주의 최대 곡창지대인 황금평에서 북한 주민들이 모내기 하는 모습.
중국 접경 신의주의 최대 곡창지대인 황금평에서 북한 주민들이 모내기 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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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사는 탈북자들은 출신 성분이나 토대와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생활합니다. 의사나 신문사 기자 등 전문직 종사자로 일하는 탈북자도 있고 평범한 회사원으로 또는 가두여성(가정주부)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 출신으로 남한에 가서 북한의 실상을 증언하고 북한을 외부 세상에 제대로 알리기에 힘쓰는 탈북자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은 90년대 말 북한 고난의 행군 시절 굶주림으로 자녀를 잃고 탈북해 중국을 거쳐 남한 부산에 정착한 탈북여성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이순경: 탈북한 것은 2007년 사람들이 굶어 죽을 때 그때 중국에 갔다가 여기 왔습니다.

북강원도 출신의 탈북여성 이순경 씨의 인생은 모질게도 굴곡이 많고 기구합니다. 그런 아픔을 짧은 시간 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왜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떠나게 됐는지 사연을 들어보면 그것은 자식을 둔 부모의 어쩔 수 없는,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순경: 우리 남편이 77년도에 정치범 수용소에 잡혀가니까 우릴 척박하고 농사도 안 되는 곳으로 추방시키더라고요. 거기 가서 3년 만에 15살 먹은 큰딸이 영양실조로 굶어 죽었어요. 그리고 4년이 흐른 뒤에 5남매인데 제일 약했던 셋째 딸이 굶어 죽더라고요. 그래도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합니다. 울지도 못합니다. 내 입에서 탄식이 나오고 나라 비방하는 말이 한마디라도 나와 봐요. 그러면 나는 민족의 반역자로 잡혀갑니다. 우리 북한 법이 그럽니다.

한집안의 가장이 하루아침에 어디론가 끌려가고 5남매의 둔 이 씨는 그래도 살아보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고난의 행군 시절 그 배고픔을 피해 갈 순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아직도 남한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90년대 북한의 실상을 얘기하면 거짓이라고 합니다. 현실이라 믿기엔 너무 남한과 북한의 실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순경: 2008년은 무리 죽임이 대단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믿질 않습니다. 중국에 나갔던 선교사들은 다 압니다. 두만강에 시체가 떠다니고 그런 모습을 봐서 압니다. 그런데 남한 사회 사람들은 무슨 사람이 굶어 죽는가 하고 안 믿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여기선 입쌀이 싫어서 너무 살이 쪄서 살을 빼는데 돈을 쓰는데 그것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굶어 죽는다는 것이 이해 안 되죠.

2000년대 이후가 되면서 탈북자들은 크게 늘었고 그 수만큼이나 중국을 경유해 남한으로 가는 탈북자의 수도 늘었습니다. 이 씨도 중국에서의 불안했던 5년 생활을 뒤로하고 남한행에 성공합니다. 물론 가족이 남한에 도착한 시기는 각각 다르지만 어쨌든 살아남은 가족들은 남한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고 부산에서 새로운 인생 출발을 하게 됩니다.

(황금나무 능금나무 산에 심어서): 황금나무 능금나무 산에 심어서 심었더니 마을에 꽃이 피어서 ….

이순경: 세월이 이렇게 갔습니다. 나는 노래하고 나 자신도 놀랐습니다. 옛날 부르던 그 음성 그대로 나오네 신기하고 나이가 60이 지났는데 놀랍죠. 하지만 나이는 어디 가서도 말 안 합니다. 나이는 묻지 말라고 하죠.

남한생활이 이제 10년이 거의 다 돼갑니다. 이젠 환갑을 지나도 한창 지난 나이인데도 옛노래 실력은 그대로인듯합니다. 이 씨가 많은 사람 앞에서 북한 노래를 부르는 시간은 북한의 실상을 증언하는 모임. 너무 오래돼서 가사가 생각이 잘 안 날 때는 컴퓨터의 가상공간인 인터넷에 들어가서 가사를 보고 몇 번 연습하면 예전 생각이 난다고 했습니다. 주로 부르는 노래는 방금 들려준 황금나무 능금나무 산에 심어서와 평부연변가, 그네타령, 반갑습니다, 휘파람 등입니다.

교회에서는 1시간가량 공연을 하지만 일반 행사에서는 15분가량 짧은 시간에 북한 노래를 부르고 북한의 실상을 소개하는 정도입니다.

이순경: 우리가 북한에서 하는 식대로 선전대에서 하는 방식으로 합니다. 한 사람이 북한에서 겪은 일을 간단히 말하고 그다음에 노래를 합니다. 가야금 독주도 하고 피리도 불고 그런 방식으로 합니다.

이 씨는 교회 전도대에서도 활동하지만 남한에서 안보강사로도 활동합니다. 주로 학교에 가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북한의 현실에 대해 알려주는 일을 합니다. 안보강사라고 하니까 북한 체제를 비난하고 남한 정부에서 주는 지침이나 교제를 따로 공부해 말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씨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북한에 대해 잘 못 알고 있는 남한 사람에게 북한주민의 실생활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도 했습니다.

이순경: 교회에서는 반응이 대단히 좋습니다. 같이 동참해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합니다. 저는 안보 강의를 각급 학교에서 많이 하고 사회단체에서도 강의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청년들은 통일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내가 대학을 졸업해도 직업을 찾기 힘들고 살기 힘든데 남북통일, 특히 못 사는 북한과 통일이 되면 더 살기 힘들다는 걱정입니다. 그러면 저는 답을 해줍니다. 당신들은 너무 행복하고 편안한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고난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서 당신들이 북한에서 태어나 공부하는 시기에 못 배우고 먹을 것이 없어서 방황하고 고아가 되고 하면 당신들은 가만히 있겠는가 라고 하면 물어봅니다. 북한에서 진짜 굶어 죽고 공부를 못하고 진짜 고아가 많은가 하고 물어봅니다.

사람 사는데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이 씨는 그것은 바로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잃은 자녀는 가슴에 묻어두기로 했습니다. 대신 남한에서 불어난 식구는 이 씨를 마음만은 부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감사합니다.

이순경: 초창기 와서는 꿈인가 했습니다. 꿈이라면 깨지 말았으면 했습니다. 믿어지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현실로 믿어지고 …아이들이 아버지 없이 어머니 고생했다고 하면서 잘했습니다. 참 대견하고 저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자식들이 좋은 곳에 와서 잘 지내고 우리는 딸이 손자만 둘입니다. 딸 손자는 23살입니다. 그다음이 19살. 큰아들에게는 19살, 13살이 있고 그리고 막내에게는 12살, 10살짜리가 있습니다. 정말 만족합니다.

(바다물 위에): 바닷물 위에 갈매기 날고요. 정든님 뱃머리에 옷자락 날린다. 어이여차 더 나갈 땐 빈 배로 가지만 돌아올 때는 뱃전이 넘친다…

이 씨가 남한 사람들을 상대로 북한의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행복했던 기억보다는 아픔이 배 이상 크지만 그래도 그 땅이 그리워 그래서 힘닿는 데까지 북한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 앞에 서고 싶은 거라고 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부산에서 북한의 실상을 증언하는 탈북여성 이순경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