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정착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북한출신 주민의 이야기를 탈북자의 지역사회 정착을 돕는 기관인 하나센터 관계자를 통해 들어보는 ‘제2의 고향’ 시간입니다. 오늘은 남한의 내륙 도시인 대구 편입니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4시간 정도 차로 가는 거리에 있는 대구 지역에는 탈북자가 540여 명 있고 매월 10명 정도가 새로 유입되고 있습니다. 대구는 인구 250만 명이 사는 남한의 3대 도시 중 하나고 예전부터 섬유업이 발달한 곳으로 남한의 광역시 중에서 대학교가 가장 많아 교육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또 대구 하면 미인이 많이 사는 도시로도 유명한데요. 그 이유는 아마도 사과농사가 잘돼 사과를 많이 먹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조량이 많아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추운 분지형태의 지역이 대구입니다.
정착에 성공했다. 또는 실패했다고 말하는 기준은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탈북자의 남한사회 초기정착을 돕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탈북자 지원사업을 10여 년 째 하고 있는 북한이주민지원센터 허영철 소장은 탈북자의 남한정착 성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허영철: 성공 사례는 두 가지 정도로 볼 수 있는데 회사나 공장 등 직장에 열심히 다니시는 것만큼 성공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한국에 온 이후로 꾸준히 한직장에 오래 다니는 분은 월급도 올라가고 하기 때문에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분보다는 4-5년씩 한회사를 꾸준히 다니는 분을 모범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다음으로 북한에서 고등중학교를 나와 한국에 온 경우인데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무료로 다닐 수 있는 혜택을 정부가 주고 있기 때문에 대학에 간 친구들 중에 벌써 2년제 전문대학을 졸업해서 취업이 된 친구도 많고 그리고 성공사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탈북자 중 처음으로 남한에서 제일 좋다는 서울대학에 들어간 친구도 대구 친구이고
대구 하나센터의 운영도 겸하고 있는 북한이주민센터에서는 탈북자가 빨리 남한 사회에 익숙해지도록 지역사회 주민과 대구에 정착한 탈북자가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도록 대화를 위주로 하는 소규모 만남의 자리부터 시작해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큰 행사도 열고 있습니다.
허영철: 행사는 1년에 4회 정도 하는데 명절 두 번, 송년의 밤, 체육대회 같은 행사에 대구에 오신 탈북자뿐만 아니라 남한 분도 모두 이 행사에 참석하는 겁니다. 이럴 때 어울려서 체육행사도 하고 명절에는 통일전망대라든지 거제도 포로수용소 같은 곳에 같이 놀러도 가고 그 외에 소모임 별로 대학교 다니는 친구들은 남한 학생들과 어울려 공부하는 프로그램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취업이라고 합니다. 대구는 섬유산업을 비롯해 안경 제조업, 우산이나 양산 제조업 등 노동 집약적인 산업이 발달한 도시로 노동력에서 남녀 차별 없이 고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임금이 남성보다 여성이 조금 적을 수는 있지만 여성이 직장을 잡는데도 큰 차별이 없이 이뤄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허 소장은 덧붙였습니다.
남한 통일부 자료를 보면 남한에 입국하는 탈북자 중 70% 이상이 여성입니다. 대구에 보금자리를 꾸민 탈북자도 여성이 절대적인데요. 탈북여성이 호소하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도 지역사회 적응을 돕는데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남한에 간 북한출신 여성의 고민은 크게 자녀문제와 부부 문제로 나타납니다.
허영철: 중국에 가족을 두고 온 경우 즉 아이를 두고 온 경우는 쉽게 바로 데려올 수 있어야 하는데 외교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을 힘들어하십니다. 부부가 같이 온 경우는 북한 사회와 비교하면 가정 안에선 훨씬 남녀평등입니다. 그런 부분에서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소지가 많습니다. 북한에선 가정 내에서 남편이 중심에 있지만 남한 사회에선 이미 평등화됐기 때문에 이런 것이 갈등도 되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생활을 잘하십니다. 여자 입장에선 좋은 것이죠.
(음악)
황은선: 시집을 가도 대구를 못 뜰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한 번 정착을 하면 제2의 고향이지만 한국에선 고향이거든요. 왠지 여기를 뜨면 정든 고향과 같이 아는 사람들 몇 년을 살아오면서 본 것 길 하나하나가 외지에 가면 그리울 것 같아서 여기를 못 뜰 것 같습니다.
실제 대구에 사는 황은선(가명)의 생활을 들어봅니다. 대구에서 6년째 사는 탈북여성 황은선 씨는 처음 2년은 신경안정제와 수면제가 없으면 밤에 잘 수 없는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던 여성입니다. 중국에 두고 온 딸이 그리워 마음에 병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남한 정부의 도움도 청해보고, 변호사에게 문의도 해보지만 결국 탈북자 중개인을 통해 돈을 써 당시 4살 된 딸 윤희를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황은선: 저는 돈을 주고 데려왔으니까. 아니면 신랑이 중국 사람이고 아이 국적이 중국이면 신랑이 오면서 같이 올 수 있고 지금은 엄마가 피검사를 해서 유전자 확인을 하면 되지만 아이를 데려올 수 있죠. 그런데 윤희는 국적이 없었어요.
중국말밖에는 모르던 윤희는 남한에서 유치원을 졸업하고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 됐습니다. 이젠 오히려 중국말을 거의 잊고 남한말만 합니다. 황은선 씨의 생활은 이제 180도 달라졌습니다. 윤희가 없었더라면 지금도 다른 탈북자들처럼 같은 북한출신들과만 어울리고 북한 말 해가면서 한국 사람과 단절된 생활을 했겠지만 이젠 탈북자 친구보다도 남한 학부모들과 더 많이 어울리고 있습니다.
황은선: 유치원 때까지는 몰랐는데 1학년 들어가면서 학교생활도 그렇고 아이 공부하는 것도 그렇고 내가 모르는 게 많으니까 아, 이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고 아쉬우니까 내 마음의 문이 열리더라고요. 개똥 같은 자존심만 피우면 내가 손해거든요. 지금은 하루하루 앞으로 아이가 자라면서 어떤 일을 겪겠는지 그게 궁금하고요.
남한보다 못사는 북한에서 왔다는 피해의식에서 소극적으로 정부의 도움으로 살던 황 씨. 그를 변하게 한 것은 딸을 누구 못지 않게 잘 키우고 싶다는 어머니의 마음에서 시작됐습니다. 굳게 닫혔던 마음은 한순간에 열리게 됐고, 옆집 사람과 인사를 하게 됐으며 윤희가 다니는 학교 학부모들의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석하면서 자연스럽게 남한 사회를 배워가는 중입니다.
황은선: 국적이 한국 사람이라 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곳 사람들과 휩쓸려 살아야 하는 건데 그게 어려워요. 1학년 1학기 때는 말을 안하고 모자 눌러 쓰고 학교 앞에 가서 아는 엄마들과만 얘기하고 했죠. 그런데 지금은 내가 먼저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털어놔야지 그 사람들이 내게 다가올 수 있겠다 해서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시간이 걸리거든요 그러면 나는, 아이는 동화할 수 없더라고요. 지금은 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또 아이 때문에 힘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언젠가는 아이에게 엄마가 북한 출신이란 사실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엄마가 거쳐온 험난한 세월을 딸에게만은 주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황은선 씨는 열심히 남한 생활을 딸 윤희와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의 내륙 도시인 대구 편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남한의 제2의 수도로 불리는 항구도시 부산 편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