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약한게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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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사는 탈북자는 최소 3번 정도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말합니다. 두만강을 넘을 때가 첫 번째고 중국에서 숨어살면서 그리고 제3국을 경유해 남한까지 도착하는 것이 모두 고비의 순간들입니다. 오늘 소개하는 탈북여성은 마음이 너무나 여린데 이런 고비를 모두 넘긴 분입니다. 김유라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유라: 힘든 일에 부딪치면 내 마음이 주저앉으면서 헤어나가질 못해요.

함경북도 무산군이 고향인 김유라 씨는 9살 된 아들과 현재 남한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북한을 떠난 것은 1997년입니다.

김유라: 저의 탈북과정은 북한에서 정말 힘들게 살아서 잊지를 못해요. 엄마하고 살았는데 맛있는 것 있으면 다 저를 챙겨주시고 엄마는 굶고 다니니까 내가 없어지면 엄마가 더 잘 드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강을 건넜어요.

중국에 가서는 생각처럼 되질 않았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도 벌어 북한에 있는 엄마에게 송금도 해서 먹는 것 걱정 하지 않고 살 수 있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강을 건너는 순간부터 항상 중국 공안을 피해 살아야 하는 숨죽이는 생활이었습니다.

김유라: 중국에서의 생활은 고통도 많았고 온전한 남자에게 시집을 못가면 돈도 없고 집도 없고 힘든 생활을 해요. 당시 두 번이나 잡혔어요. 북송은 안됐는데 아들이 어리다 보니까 풀려나왔어요. 돈만 주면 풀려나오는 거예요. 같이 잡힌 두 명은 북송이 됐는데 나는 돌려보내주더라고요.

중국에서 14년을 살게 됩니다. 그동안 조선족 남성과 결혼도 하게 됐고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신분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안됐고 가난을 벗어날 기미도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선택을 하게 되는 데요.

김유라: 한국에 입국해서 5개월 동안 정말 힘들었어요. 말도 안통하고요. 시장에 나가면 모두 돈 주고 사먹어야 하잖아요. 채소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요. 생활비도 필요하고요. 우리는 빈손으로 왔는데 통장에는 40만 원 정도 밖에 없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열심히 한 번 살아보자 결심하고 사회에 뛰어들었는데 상사에게 지적을 받고 하다보니까 한국이 무섭다는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3년 정도의 남한생활 적응기간을 겪게 됩니다. 처음 들어간 회사가 임산부의 태아 건강을 알아보는 초음파 기계 조립 회사입니다. 초정밀 기계를 만드는 만큼 납땜질이 중요한 데 작은 실수만 있어도 기계가 작동하지 않아 불량이 납니다. 외래어를 많이 쓰는 직장에서 김 씨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이었죠. 하지만 두드리면 열린다고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상태에서 김 씨는 생활에 적응하게 됩니다.

김유라: 내가 또 벌어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하고요. 내가 열심히 안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고, 애도 있고 하다보니까 저도 모르게 적응이 되더라고요. 이사람 저사람 부딪치면서 사회생활을 하다보니까 적응이 빨라지고 말도 외래어 때문에 못 알아듣는 말이 많았는데 점차 알게 되고 옆에 있는 언니들 도움도 많이 받았어요.

북한 분들이 남한에 가서 빨리 남한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비법을 하나 공개합니다.

김유라: 모르면 옆 사람에게 물어보고 그랬어요. 무슨 뜻이에요 이렇게 바로 붙잡고 물어보고 그랬어요. 식당가면 차림표에 갈매기살이 있으면 날아다니는 갈매기의 살을 요리한 것인지 물어보고 그랬어요. 많이 질문하고 그랬어요. 모르면 당장 가서 물어봐요. 옆에 무슨 말이 들리면 잘 기억했다가 아는 분에게 물어보고.

외래어 중에 뷔페란 말이 있습니다. 음식이 상했다는 말이 아니고 일정금액을 지불하면 자기가 먹고 싶은 양만큼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는 식당입니다. 김 씨의 남한에 대한 첫인상하고도 연관이 있는 단어죠.

김유라: 서울 시내구경을 하는데 63빌딩에 갔어요. 한국이 발전했고 깨끗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초밥집엘 갔는데 뷔페식당이었어요. 난생처음 보는 음식들이 많았어요. 어떻게 먹는지 몰랐는데 물어보니까 마음껏 먹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마음대로 먹었죠. 한국에 와서 새로운 것들이 많이 느껴지더라고요.

김 씨는 남한에 가서 35세가 됐을 때 대학진학을 합니다. 남강원도 춘천에 있는 한림성심대학 물리치료학과에 들어간 겁니다.

김유라: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신경치료도 해주고 물리치료도 해주고 재활치료를 해주더라고요. 거기서 나도 해보고 싶다 하는 마음이 들어 그냥 쉽게 생각했죠. 북한처럼 한국어로 공부하는 것으로 생각한 거죠. 마침 특별전형으로 대학에서 학생을 뽑아서 지원서를 냈는데 된 거죠. 영어를 모르다보니까 단어를 외울 때도 나만의 방법으로 했어요. 단어를 발음할 줄 모르니까 알파벳으로 그냥 외우고 교수님들도 잘한다고 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학교 공부를 하면서 시간제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있습니다.

김유라: 아르바이트는 이것저것 다해요 고정이 없고 식당도 가고, 사무직도 가고 다해요. 족발집 하는 언니집에서도 일하고요. 아르바이트다 보니까 시간당 6천 원씩 하루에 5시간 하죠.

아들은 4살 때 중국에서 데려와 함께 살고 있는데요.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들은 엄마 말도 잘 듣는 착한 아이랍니다.

김유라: 숙제는 아이가 알아 척척해요. 모르는 것이 있으면 내가 도와주기도 하는데 가정통신문에서 오는 내용이 저에겐 어려울 때가 있어요. 학교에서 뭘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부모님의 의견을 묻는 일이 있는데 내용을 모르니까 제가 선생님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보면 알려주죠.

강한 마음을 가져야 되는데 마음이 여린 김유라 씨는 자신의 이름처럼 마음이 유리같아서 작은 일에도 상처받고 힘들어합니다. 그럴 땐 조용히 노래를 불러 보는데요.

장윤정의 노래 '올래'

현재는 힘들어도 밝은 내일을 믿기 때문에 오늘을 감사한 마음으로 보낸답니다.

김유라: 일단 좋은 직장을 다니고 싶고 여행도 바다 가고 싶으면 바다 가고 산에 가고 싶으면 산에 가고 그렇게 하고 사는 것이 내 꿈이에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김유라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