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 밖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개구리는 자기가 보는 것이 세상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남한 통일부는 남한입국 탈북자의 70% 이상이 여성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 분포도를 보면 유아부터 70대 고령까지 정말 다양합니다. 오늘은 북한에서 환갑을 보낸 후 현재 남한에서 생활하는 탈북자 김두한(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두한: 다 나한테 달렸습니다. 내가 잘하면 잘되는 것이요. 못하면 못되는 것이고 그렇습니다.
올해 72세가 되는 함경북도 출신 탈북자 김두한 씨입니다. 그가 북한을 떠난 것은 90년대 말입니다.
기자:북한에선 안정적인 생활을 했는데 어떻게 탈북 하셨나요?
김두한: 그것을 말하자면 좀 길어지는데 원래는 아오지 탄광 출신입니다. 제대될 때 지방산업 탄광이란 곳에 배치됐습니다. 내가 군대시절에 특수훈련을 받았는데 당시 안전원들이 사회 나가면 코피 터지게 맞고 다니니까 무술을 좀 가르쳐주라고 해서 안전부에 들어가게 됐고 또 내가 어렸을 때 글을 잘 썼습니다. 북한에서 1965년부터 김일성이 주민대장을 만들었는데 그걸 작성했습니다.
고향을 떠나 탈북하게 된 동기를 물어 보니 북한에서 한평생 그가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일반 농민이 아닌 당간부로 있던 그가 탈북을 했다면 그 이유는 뭘까 다시 질문을 하자.
김두한: 김일성 죽고 1995년부터 서서히 북한이 식량난 타격을 받기 시작했는데 함경북도에서는 막 사람들이 죽어갈 때입니다. 98년 맏아들이 사망했습니다. 나도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누가 옆에서 무슨 말만 해도 화를 낼 때인데 막내아들이 이러다간 다 죽는다면서 중국으로 도망간 고모에게 도움을 청합시다. 이럽디다. 그래서 처음 두만강 도강했습니다. 돈 받아 가지고 왔는데 막내아들은 계속 중국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99년 막내가 보위부에 체포돼서 아직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일로해서 내가 정신이 좀 돌아간 것 같습니다.
4남매 중 셋을 잃고 김두한 씨는 탈북을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북한에서 30여년을 탄광에서 당비서를 했다고 하고 안전원도 했다고 하기에 북한에서의 직업을 남한 경찰이 하는 일과 비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김 씨는 아무리 인간권리 즉 인권을 존중한다고는 하지만 남쪽은 공권력이 주민 앞에서 너무 힘이 없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하기까지 합니다.
김두한: 북한에 있는 안전원은 세상에 있는 권한을 다 가졌습니다. 당보다 당 꼭대기에 올라앉은 것이 안전원, 보위지도원들입니다. 그래서 서민들은 안전원이라고 하면 부들부들 떱니다. 곁에 가도 다릴 떠는 정도인데 여기 경찰은 가만히 보니까 아무 권한도 없고 단지 치안유지밖에는 없습니다. 여기는 형사가 불쌍하게 보입니다. 일반 서민들까지 형사들에게 멱살을 잡고 술 먹고 파출소 들어가서 때리겠다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이러면 총 맞아 죽습니다.
일반 북한 노동자를 감시하고 지도하는 입장에서 한평생을 산 김두한 씨는 남쪽생활을 통해 무엇을 느꼈을까? 그리고 김 씨가 느끼는 남북한 생활 차이는 어떤 것일지 청취자 여러분도 들어보시죠. 아마 많은 부분 공감을 하실 겁니다.
김두한: 나는 북에 있을 때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 얼굴을 못보고 밤늦어 별을 등에 이고 들어와서는 그저 저녁이나 먹고 자고 했는데 여기선 부모로 자식들 교양할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하다. 자기 일만 하고 와서는 자기 가정에 가서 아이들도 봐주고 한단 말입니다. 그 다음 백성들이 마음대로 다니니까 제일 좋습니다. 북에선 통행증, 여행증이 있어서 그게 없으면 한 개 군에서 리 어간도 이동을 못합니다. 북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보다 하지만 사람이란 것이 볼 것은 보고 즐길 것은 즐기고 느낄 것은 느껴야 하는데 그게 없단 말입니다. 또 내가 북한에서 내가 만들어 놓은 주민대장이 사람들 계층을 따지니까 사람들 고통 줍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떤 문건을 써도 출신성분 계층이 없고 현재 내 기술만 놓고 따지니까 나만 똑똑하면 괜찮다.
김두한 씨가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갈 때 제일 걱정했던 것이 식의주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이가 40대 정도만 됐어도 뭐든 할 수 있겠는데 벌써 환갑을 넘어버렸으니 직업을 잡을 수 있겠는가? 만약 직업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제일 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남한에 가니 정착금에 또 나이가 많다고 노인연금까지 주니 남쪽 생활10년이 눈 깜짝할 사이 가버렸다고 했습니다.
김두한: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내가 40대, 50대에만 왔어도 나는 이렇게 안 살겠는데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내가 왜 진작 이런 것을 몰랐는지 아쉬운 생각 많이 듭니다. 우린 거기서 어머니 젓꼭지 떨어지면서부터 계속 김일성이 최고고 노동당이 최고고 남조선 괴뢰도당은 인간이 몹쓸 사람들이고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들이라고 했는데 와보니까 사람이 이 이상 좋을 것이 없고 이 이상 좋은 사회가 어디 있는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자꾸 기관에서는 한국보다 미국이 더 좋다고 합니다. 어쨌든 여기 오니까 살맛은 납니다.
북한에서 비서일을 할 때 대원들이 남조선에선 굴뚝 없는 집을 짓고 텔레비전을 원격조정 한다고 하면 그런 것이 어디 있냐며 욕을 했다던 김두한 씨. 지금은 자기가 그런 세상에 살고 있으니 어이가 없는 생각도 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을 북한주민도 나눌 수 있는 날을 희망하면서 그가 말하는 남쪽 생활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김두한: 우선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내가 기술이 있고 재능이 있어 뭘 하자면 그것에 대해 막는 사람이 없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탄광일 하면서 산양이나 양을 좀 키우면 어른들이 뭐라고 하냐면 너 집에서 그렇게 자본주의하고 무슨 힘이 있어서 나와 혁명을 하냐? 이렇게 시비를 겁니다. 그런데 여긴 그런 것이 없습니다. 노력한 만큼 벌어들이는 것이 대한민국 아닙니다. 북한은 각 조직에서 많이 제동을 겁니다. 당원은 당 회의에서 민청원은 민청 회의에서 여맹은 여맹 회의에서 그럽니다. 여기는 남이 하는 일 간섭안하고 내가 노력한 것만큼 생활에 보탬 되니까 이게 좋아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북한 탄광촌에서 30여년 당비서 일을 했다는 김두한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