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일이 잘못된 뒤에는 후회하고 손을 써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뜻하지 않는 사고나 재난에 대비해 보험이란 상품도 생겨났습니다. 오늘은 남한에서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윤일남(가명)씨의 얘기 전합니다.
윤일남: 꿈은 제가 일한지 1년 됐는데 입사 5년이 되면 최소한 연봉이 5천에서 1억 원까지 받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윤일남 씨는 보험 상품을 파는 보험설계사입니다. 먼저 보험이 어떤 것이지 간단하게 소개를 하자면 보험이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고나 재난에 대비해 미리 일정한 돈을 내고 사고가 터졌을 때 정해진 금액을 받도록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집에 불이 날 것에 대비해 화재보험을 든 사람은 화재가 발생해도 보험금을 받아 다시 새집을 짓을 수 있겠고 암 보험에 가입한 사람은 질병치료에 들어가는 비용을 보험금을 받아서 해결하면 되니 병원비 걱정을 안 해도 될 겁니다. 이렇게 보험 상품을 파는 사람을 남한에서는 보험설계사라고 하는데요. 윤 씨는 왜 탈북을 하게 됐는지부터 들어봅니다.
윤일남: 저는 1997년 1월에 탈북 했는데 탈북 전 3년 이상을 너무 힘들게 살았습니다. 풀도 못 먹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설 지나 가족끼리 모여 앉아서 이러다 죽겠다 했죠.
어머니가 저희에게 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때는 남한으로 간다는 생각은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로 수 있는 중국으로 일단 가자.
14살 된 동생 손을 잡고 도강을 했고 무사히 중국에 있는 친척집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6개월 후에 다시 만난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에 상처를 받습니다.
윤일남: 나머지 가족은 여동생이 있었는데 나중에 굶어 죽었다고 그렇게 소식을 들었고
2010년 윤 씨 가족이 한국에 도착하기 전 까지 중국에서 서러움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기자: 중국에서 13년 생활은 어땠습니까?
윤일남: 처음에는 친척을 의지했는데 국경지역이라 너무 위험했습니다. 어머니도 한 번 북송을 당했고요. 엄마가 시집간 곳에서 농사일도 해보고 광산일도 하고 15살부터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일을 한다 해도 중국아이들은 자기가 번 돈으로 아이스크림 사먹고 구두고 사신고 하는데 저는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일은 더 해도 먹는 것은 눈치를 보고 사서 먹고 했습니다. 경찰 보면 무서웠고요. 나중에 중국어를 좀 배워서 나가 일할 때는 돈을 못 받아도 제가 무서워서 싸우질 못하겠더라고요. 제일 눈물 나는 것은 아무 이유 없이 아이들에게 맞고 이러는 것이 너무 분했습니다. 어디 가서 하소연할 때가 없잖아요. 신분이 불법이라 경찰에도 갈 수 없고 때리면 맞고 그럴 수밖에 없었죠.
나라 없는 설움을 톡톡히 맛본 윤 씨는 한국행선을 잡아서 신분해결이 이뤄집니다. 그때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그동안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에 힘든 일을 참아내는 것에는 이골이 난 겁니다.
윤일남: 처음에는 중장비 학원에 반년정도 다니다 농원에 가서 묘목 심는 것을 하다가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화물차 단속요원으로 3년 일했습니다. 과적차량이나 적제불량을 단속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현대중공업에 가서 한 3개월 일 했는데 적성이 안 맞아서 바로 나와 보험 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보험설계사 손에 잡히고 보이는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걱정 즉 보이지 않는 상품을 취급하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그 대상이 탈북자만 아니라 일반 남한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라 어려운데요.
윤일남: 솔직히 남한생활이 얼마 안 된 사람은 보험을 이해를 못해요. 저희가 한국에 오면 정부에서 5년은 의료보험 1종을 줘서 병원을 가도 돈을 안냅니다. 또 나이 많은 분들은 돈이 아까우니 보험을 안 들고 젊은 사람은 병원도 안가는 데 왜 보험을 드는가 하고요. 몇 년 산 사람들은 보험을 필히 들어야 된다고 하고 얘기를 하면 좋아 하는데 이미 보험을 가지고 있고요.
20대 후반에 남한에 간 윤 씨는 남들처럼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북한에서 5년 정도 공부한 것이 전부인지라 책을 손에 잡아도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고 당장 생활을 위해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정고시를 통해 중학교 졸업장은 받았는데요. 자본주의 사회는 서로 경쟁해서 가져가는 사회인데 힘들지는 않은지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윤일남: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영업이나 사업하는 분들은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생산직에서 일한다고 볼 때 자기가 열심히 한만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제가 북한에도 있었고 중국에도 살아봤고 하지만 돈일 있어도 고민은 있고 없어도 행복할 때도 있고요. 제가 북한에 있었다면 굶어 죽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남한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하고 싶은 말 하고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면 다른 회사 찾아가면 되고 자유로운 것이 좋습니다. 주변에서 힘들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무려면 북한에서 보다 힘들겠습니까?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따뜻한 물 나오고 난방장치 되고 얼마나 좋냐고 그런 말을 많이 합니다.
현재 여동생과 어머니 이렇게 세 식구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윤씨는 주중에는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탈북자들로 구성된 봉사단체에서 어려운 독거노인이나 고아원을 찾아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탈북자이기 때문에 같은 북한 출신 여성을 만나 결혼하고 싶다는 윤 씨. 큰 부자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 다며 겸손한 마음 까지 갖췄습니다.
윤일남: 네가 지금도 항상 마음속에 그리움과 외로움 가족이 북에 있는 아픔을 잘 알기 때문에 탈북자분들에게 가족이 되어주고 싶고 다른 사람에게 뒤처지지 않게 자원봉사도 많이 하고 가족이 남한에 왔으니까 더 노력해서 어머니 남은 인생 북한에서 누리지 못했던 행복을 많이 안겨드리고 싶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윤일남(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