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식품 개발에 이어 책을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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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에서는 동의사였던 탈북민이 체제가 다른 남한에 가서는 의사 국가자격증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값진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산에서 건강원을 운영하면서 의료봉사활동을 하는 강유 씨를 기자가 만났습니다.

동의사 강유 씨는 지난 1999년 10월 탈북합니다. 당시 직업은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읍에서 방진선박 진료소장이었습니다. 탈북한 후에는 중국에서 다시 동의사로 5년을 생활한 뒤 남한의 항구도시 부산에 정착합니다. 기자는 강유 씨의 사무실을 찾아 그의 남한생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자: 사업을 하셨는데 특허 받은 것도 소개를 해주시죠

강유: 2009년에 오미자 시럽으로 특허를 받았습니다. 남한에 오니까 오염된 공기가 많더라고요. 한의학에서 오미자하고 도라지는 오염된 공기를 마셨을 때 가래를 잘 나가게 하고 그것을 정화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특허를 받고 2013년에 탈북자 저소득층 사람을 위해 사회적기업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판로가 안돼서 1년만에 폐업을 했어요. 그리고 다시 1년을 쉬고 멈췄던 건강원을 사업장 내서 사업하고 있습니다.

기자: 건강식품을 제조해서 판매하시는 거군요

강유: 그렇죠.

북한 청취자들은 건강식품이란 용어가 생소할 겁니다. 일반적으로 건강보조식품, 장수식품 등으로 말하는데요. 건강식품의 사전적 의미는 보통 식품보다 건강의 유지와 증진에 효과가 있거나 그렇다고 생각되는 가공식품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건강에 좋다고 알려진 원료를 이용해서 만드는 식품이란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식품일뿐 약은 아닙니다. 그래서 강유 씨는 몸에 좋다는 원료를 이용해 식품을 개발하고 특허를 받아 판매할 수 있었던 겁니다.

기자: 힘든 일을 극복한 비결은?

강유: 저는 정말 사람위해 그 사람 믿고 충정을 다받쳤지만 결국 고향에 살지 못하고 탈북했는데 한국에 와서 보니까 정말 우리 가정을 생각해주고 울어 주고 하는 것이 내 가슴을 울컥하게 했어요. 여기도 사람사는 세상이구나 했죠. 북한에서는 사람살지 못할 세상이라고 했는데 그게 전혀 아닌 겁니다. 실제 내가 살아보니까 정말 같이 울어주는 사람 위해주는 사람이 내 주위에 이렇게 많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그런 것으로 잘 정착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방송을 듣는 분들은 남한에 가서 14년을 잘았는데 뭐가 좋던가? 이런 질문을 할 것같은데요

강유: 북한과는 대비를 못합니다. 난 지금 함경남도 도위원장보다 생활이 더 윤택합니다. 내가 먹고 싶은 것 먹고 가고 싶은데 가고 하고 싶은말 하고 이것은 북한에서는 할 수도 없는 겁니다. 북한의 도위원장도 자가용차가 없습니다. 나는 내 자가용차를 가지고 오늘 내가 제주도 가자면 제주도 가고 강원도 속초 가자면 갈 수 있고 그리고 가족이 모두 함께 놀러도 갈 수 있고요. 북한에서는 생각지도 못하는 일입니다. 북한과 남한은 천지 차이입니다. 이런 것은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남한은 사람 못사는 곳으로 알았는데 실제 내가 살아보니까 북한에서는 꿈도 못꾸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남한 사람들은 숨쉬듯 자연스러운 받아들여지는 것이지 소중한 것을 모르거든요

강유: 그렇죠. 남한 사람들은 밖에 나가서 보면 자기 나라가 잘 사는 것을 아는데 집안에서는 잘 몰라요. 그래서 항상 불평을 하는데 우리는 이렇게 잘사는데 무슨 불평이 그리 많은지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강유 씨는 1974년 함경남도 보건간부학교를 나와 동의사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남한에 입국한 2004년 당시에는 탈북자를 위한 법제정이 현재와 달랐습니다. 그때는 북한 의사 자격증을 인정하지 않았고 남한에서 다시 대학을 졸업해야 의사 시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환갑이 지나 다시 대학공부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실망도 했는데요. 그러던 차에 부산을 시발점으로 남한 전역에 확산된 의료봉사단체인 '민중의술 살리기'의 초대 회장이 되면서 새 삶을 시작합니다.

강유: 고등학교 교장선생님들…처음에는 민중의술 거기서 대체의학을 전국에 보급하자고 결의했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의술이 여기 남한 한의사 것 하고 틀려요. 그래서 저녁마다 강의를 했어요. 그때 1기생들 한팀이 만들어져서 침술, 청진한방, 부황 이런 것을 배운 다음에 자원봉사를 요양원, 양로원 등에 봉사를 한겁니다.

기자: 의술이 취미나 관심만 가지고는 안되고 전문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의료봉사가 가능했습니까?

강유: 네, 이분들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침을 강의할 때는 내몸에 100대를 놓을지언정 함부로 환자의 몸에 침을 놓아서는 안된다 했죠. 자기 몸에 침을 놓으면서 배웠습니다. 봉사활동 때는 침은 안시키고 청진을 하거나 안내하고 이런 것을 시키고 침 놓는 것은 내가 했습니다.

기자: 보통 침은 얼마나 배워야 놓을 수 있나요?

강유: 난 6개월을 배웠습니다. 중국에서 1964년 모택동때 '맨발의사 강습반'에서 배웠는데 8개월 때부터 실습했습니다. 그때 배운 것이 제몸에 실습하고 다음에 다른 사람에 놓아라 이것이 구호입니다. 처음 입학했을 때 54명이었는데 졸업할 때는 20명이었습니다. 자기 몸에 놓는 것이 너무 아프고 하니까 다 나가고 졸업할 때 20명 남았습니다. 그때 우리가 벙어리, 청각장애인. 소아마비 이런 분들을 치료해서 성과를 많이 봤습니다.

기자: 그때가 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강유: 1965년 65년 중국 문화혁명이 나기 바로 전입니다. 연변의학원 학교를 가자고 했는데 문화혁명이 나서 학교를 못갔습니다.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 단독으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서 5년 동안 살면서 북한에 있던 가족을 모두 탈북시킬 수 있었고 강유 씨는 가족과 함께 남한에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기자: 입국했을 때보다 지금은 자녀분들이 많이 늘었나요?

강유: 올때는 우리 부부하고 딸 3명 하고 손녀 하나 하고 해서 6명이었는데 지금은 사위 둘하고 손자 손녀 하고 해서 10명이 됐습니다.

기자: 가족도 늘고 이제 남한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는데요

강유: 그렇죠. 가족도 늘고 이제는 집도 우리 셋째는 아파트 샀고 큰 차도 샀고요. 딸 세명은 회사 생활 10년이 됩니다.

기자: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세우고 계십니까?

강유: 저는 자원봉사를 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의술을 무료로 전파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책을 내서 알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알리고 해서 건강관리를 할 수 있도록요. 책 제목은 "건강관리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국 국민이 건강관리 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하는데 저의 남은 여생을 다 받치려고 합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부산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는 강유 씨를 기자가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