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중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통해 난민자격을 얻어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 노경미 씨. 그는 스스로가 성공한 탈북민이며 앞으로 행복하게 살 날만 남았다고 말합니다. 특히 중국에서 생이별 했던 딸과 남한에서 재회한 노 씨의 정착이야기 전해드립니다.
노경미: 제가 타서 처음 비행기를 타봤거든요. 그러니까 너무 감격하고 비행기가 뜨는 순간 이제는 내가 살았다는 생각이 드니까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거예요.
이 세상에 태어난 기분이 들어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났다는 노경미 씨. 함경북도 경원군 출신의 노 씨는 중국에서 베이징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8개월만에 난민인정을 받아 제3국을 경유해 한국에 도착합니다.
노경미: 우선 공항에 새벽에 내리니까 그 불빛이 얼마나 황홀한지 너무 좋았어요.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더라고요. 너무 좋아서요. 이곳을 올 때까지 정말 힘들게 살아왔잖아요. 그 의지만 가지면 남한사회에 와서 정착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 정다운 고향 두고 기약도 없이 산 설고 물 설은 이역땅을 땀과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여기 자유를 찾아 험한 사선을 넘어 한국을 찾아왔는데 그 힘든 고비도 넘겼는데 정착 못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저는 오늘까지 여기 와서 국가 공휴일 빨간날도 하루도 쉬어본적이 없어요.
노 씨는 집을 배정 받은 다음 날부터 일을 시작합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4살.
노경미: 생산직은 나이 때문에 힘드니까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간병인으로 취업하면 좋겠다고 해서 전화번호를 받아서 한국 사회에 나온 그 다음 날 찾아가니까 우리집에서 버스로 세정류장 거리밖에는 안되더라고요. 병원 팀장이 딱좋은 나이에 오셨다고 했어요. 여기는 나이 많은 사람은 힘들어 못하고 젊은 사람은 얼마 하지 않아 그만 둔다면서 바로 일하라고 해서 그래서 그 다음날부터 일하기 시작했어요.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직업인 간병인 일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직종의 일을 찾게 됩니다.
노경미: 안 되겠다 이것도 아니구나 해서 혼자 전단지를 만들었어요. 알뜰한 청소아줌마가 있으니 청소가 필요한 분은 연락주세요. 이렇게 8개동 엘리베이터에 전부 전단지를 붙였어요. 전화번호를 써놨더니 그날로 일자리가 서른 곳 넘어 오더라고요. 그날로 사장이 되고 사원이 된 거예요. 파출부에서 나와서 혼자 일자릴 찾아 한 것이 오늘까지 계속 하고 있어요. 병원 일은 3개월 전부터 하는 데 여기는 새벽에 나와서 일하고 일요일은 식당 아줌마가 쉬니까 하루종일 있는 겁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물에 빠진 솜처럼 몸이 무거웠지만 그 보상은 달콤했답니다.
노경미: 내가 열심히 사니까 열심히 하는 것만큼 돈이 벌리고 내 기쁨이 커지니까 더 일하고 싶고요. 지금까지 억대를 벌었다면 모두 놀랄거예요. 그렇게 제가 열심히 살아서 북한 동생들에게도 돈을 보내줬고 딸도 12년만에 여기서 찾아 출가도 시켰고요. 이제는 행복한 길만 남은 거예요.
그런 남한생활 중 또 한번의 기적이 일어나는데요. 중국에서 생이별 했던 딸을 12년만에 남한에서 만난 겁니다.
노경미: 제가 여기 와서 1년 후인 2010년 8월이예요. 파출부로 일할 때인데 전화가 왔어요. 그런데 딸이름이 뭐죠? 몇살이죠? 두만강을 몇시에 건넜죠? 물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탈북자인데 저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으로 봐서는 국정원 선생님 같은데 우리 딸이 한국에 오지 않았어요? 하고 물으니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놀라지 마세요. 딸이 한국 엄마의 품으로 찾아왔어요. 그게 12년 만인데 그말을 듣는 순간 내 다리를 꼬집어 봤어요. 18살 잊어버린 딸을 30살이 돼서 다시 만났어요.
너무 고생을 해서 그런지 딸은 키도 안 크고 헤어졌을 당시인 18살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현재는 약국에서 약사보조일을 하고 있는데요. 모녀상봉의 그날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답니다.
노경미: 여보세요 하니까 엄마 하고 우리 딸이 우는 거예요. 너 살아있구나 나도 살아있고 건강하니 보는 구나 하면서 정말 드라마 같은 일이죠. 하나원에서 나와 오후 3시에 만났는데 새벽 5시까지 붙들고 울었어요. 이제는 출가했고 외손녀도 봤고 정말 기쁜일 행복한 일만 있습니다.
남한생활 10년이 가까워 집니다. 노 씨는 단순노동을 통해 남부럽지 않은 부자가 됐지만 그의 생활은 오늘도 처음 정착한 첫날처럼 변함이 없답니다.
노경미: 직업에 귀천이 있어요? 내 직업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나는 새벽 3시부터 나와 일해요. 병원에서 의무실, 간호사실, 원장실, 병실 청소를 하고 아침에 환자 식사를 봐줘요. 그리고 가정집 파출부 일을 하죠. 오후 5시에 일이 끝나고 손녀를 찾아와서 딸이 퇴근 하는 7시 반까지 있다가 상가건물 몇 개 맡은 데 가서 밤 10시까지 가서 일해요. 나는 드라마 볼 시간도 없고 아플래야 아플 시간도 없어요.
기자: 노는 날은 언제인가요? 언제 쉬세요?
노경미: 저는 쉬는 날이 없어요. 그런데 저는 여유 시간이 많잖아요. 지금 시간도 환자 식사를 주고 청소가 끝났으니까 여유 시간이 있잔하요. 그래서 피곤을 풀고 있어요. 계속 일하는 게 아니니까요. 예전에는 힘들게 일하고 힘든 집에 가서도 아무소리 못하고 일했는데 이제는 일꺼리가 너무 많아서 한 번 가서 아니다 싶으면 내가 안 해요. 일꺼리가 많기 때문에 골라하는 거예요. 내가 맡은 아파트는 70평이 넘은 별장 같은 곳이라서 일주일에 한 번 가면 매번 내가 가서 해서 기본 먼지밖에 없어요. 일이 힘들지 않으니까 장기간 하는 거죠.
기자: 여행은 안가세요? 일만 하세요?
노경미: 네, 아직까지는요. 내가 국민연금도 타고 노인연금을 타면 그때가서 얼마든지 다닐 수 있잖아요. 나는 용인 에버랜드도 안 가봤어요. 딸이 엄마는 왜 그렇게 사는가 하지만 내 주먹에 힘이 있을 때 일해야지 나이 먹어 힘이 없으면 누가 청소하라고 오라 하겠는가? 앞으로 여행갈 날은 많다 아직은 안간다 이러면서 지금까지 여행을 한 번도 가지 않았어요.
열심히 벌어 노후를 준비하면서 당당하게 또 감사한 마음으로 지낸다는 노경미 씨. 그의 말처럼 최고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보입니다.
노경미: 난 행복하다고 봐요. 이제는 고객이 좋은 사람들만 있잖아요. 정말 저에게 열심히 산다고 칭찬하고 나에게 오라고 해요. 내 직업이 정말 좋구나. 돈 높이가 올라가고 하니까
열심히 살죠. 난 일하면서 힘들다고 생각 안 해봤어요. 항상 기쁨에 넘쳐서 일하지.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정착에 성공한 탈북민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노경미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