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은 천국으로 가는 통로?

2003년 5월 9일 북한을 탈출해 중국주재 한국대사관에 머물던 여성탈북자 12명이 마스크를 쓴채 새벽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2003년 5월 9일 북한을 탈출해 중국주재 한국대사관에 머물던 여성탈북자 12명이 마스크를 쓴채 새벽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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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사람들은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돼서 멋진 인생을 살아보고 싶어 합니다. 현실이 힘들 땐 그런 마음이 더 들게 마련인데요. 오늘은 가톨릭 대학 3학년생으로 북한에서 남한드라마를 보고 탈북하게 됐다는 김수지(가명)씨의 얘기 전합니다.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김수지 씨는 19살에 단독 탈북 합니다.

김수지: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봤어요. 그러다 보니까 가고 싶다는 마음이 어릴 때부터 있었는데 마침 한국에 이모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2009년이었어요.

기자: 당시에 북한에서 본 드라마는 어떤 거죠?

김수지: 굉장히 많이 봤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천국에 계단이예요.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거라 기억에 남아요.

기자: 북한에서 직업이 뭐였기에 드라마를 그리 많이 봤죠?

김수지: 학생이었어요. 고등중학교 학생이었고요. 드라마를 제가 빌려 보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빌려오면 저는 몰래 같이 보고 그랬죠.

멋지게 살아보자 탈북해서 일주일 만에 남한에 도착을 하게 되는데요. 김 씨는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현실의 탈북청년 김수지였습니다.

김수지: 후회를 많이 했어요. 솔직히 일을 안 해도 잘 살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와보니까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북한에서 한국에 오면서 브로커 비용이 1,200만원이 들었는데 그 돈을 갚기 위해 일만 했어요.

기자: 4년 일해서 돈을 다 갚았습니까?

김수지: 2년 동안 일을 해서 다 갚았어요. 2년 동안은 옷 한 벌 안 사고 친구도 안 만나고 일만 했어요. 월급도 못 받아봤어요. 왜냐하면 월급을 바로 그 브로커에게 가게 만들어 놓고 전 월 5만원 용돈으로 살았어요. 엄마랑 통화를 하면서 오고 싶다고 해서 엄마, 아빠, 오빠까지 1,800만원을 들여서 오게 됐어요. 그래서 2년을 더 일한 거죠.

이렇게 만 4년을 일만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탈북비용은 물론 가족의 비용까지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김 씨는 4년 동안 3만 달러 정도 되는 돈을 벌어 브로커 비용을 감당한 겁니다. 일의 노동 강도가 높거나 기술을 요하는 일이기라서 보다는 스물 살 꿈 많은 여성이 감당하긴 쉽지 않은 일이었죠.

김수지: 하루에 거의 8시간에서 10시간을 일했고 주로 하는 일이 카운터 보는 일 물건 정리하는 일이예요. 유통기간도 확인하고 청소도 하고요. 그러면 집에 가는데 1시간 걸리고 씻고 자고 하는 것이 반복이어서 친구도 못 만나고 일만했죠. 거의 한 달에 29일 30일 일했어요.

김 씨는 혼자라는 외로움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주변의 같은 탈북자 친구들이 대학에 다니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괴로웠답니다. 정말 이런 생활을 원해 남한행을 택했던 것은 아닌데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이런 생활은 가족을 부르면서 서 다 해결됩니다.

김수지: 예전에는 불만과 후회로 살았는데 가족이 오니까 살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때 고민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하나 난 공부를 하고 싶은데 ...당시에는 저밖에 돈 벌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과감하게 돈 버는 것을 포기 하고 대학진학을 결심했어요.

부모님과 오빠를 남한에서 다시 만나 안정을 찾고는 바로 3개월 만에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이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되겠다. 더 늦기 전에 시작하자 이런 마음이 들었던 거죠. 그리고 대학진학을 합니다.

김수지: 대학가서는 편의점 일하면서 못 느낀 넓은 세계에 왔구나 하는 느낌이었고 연애도 하고 싶고 영화관에도 가고 싶고 친구들이랑 밤새 놀고도 싶어서 가족이 오고난 후 그렇게 했죠. 개봉하는 영화는 다 보고 친구 집에서 놀다가 늦게 들어오고요. 가족들이 한국 온지 얼마 안됐을 때라 내가 한국에서 이런 식으로 산 줄 알고 오해를 해서 내가 해명을 하고 그랬죠.

부모님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만 하면서 지냈는지 보지 못했기 때문에 김 씨의 풀어진 모습을 보고는 놀라했지만 그런 문제는 이제 웃으면서 과거일로 돌릴 정도가 됐답니다.

대학에서는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3학년인데요. 북한에서 대학을 다녀보진 못했지만 확실히 다른 점은 느낄 수 있답니다.

김수지: 일단 제가 북한에 있었을 때도 남녀 혼성반이었는데 남자랑 졸업 때까지 말도 못햅보고 눈도 안 마주치고 선을 긋고 살았는데 여기는 남녀가 친구는 아니어도 너무 친한 거예요. 그게 잘 적응이 안됐고 수업시간에 토론이 있는데 북한에서는 질문에 답이 하나 정해져 있고 창의적으로 자기 생각을 발표하고 그런 것이 없어서 너무 어린 친구들이 공부를 잘한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남북한의 젊은이들 강의실에서 또는 대학교정에서 잘 어울릴 수 있을까요? 김 씨는 이것도 문제없다고 말합니다.

김수지: 내가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나를 얕잡아 보지 않을까 편견을 갖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내가 탈북자라고 밝히기를 꺼려했는데 대학가서 어린 친구들하고 생활하다보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주는 거예요. 내가 혼자 걱정을 했던 거죠. 그때부터는 당당하게 밝히게 됐어요.

대학생 김수지 씨는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각종 정보를 쉽게 받아볼 수 있도록 인터넷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느끼고 있답니다.

김수지: 저는 북한에서 살았으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살았을 것 같아요. 여기서는 꿈이라고 하는데 그런 꿈조차 없이 살아가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참 오길 잘했다 그런 생각을 하죠.

요즘 김 씨가 항상 흥얼거리고 다니는 노래라고 합니다. 북한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요.

김수지: “십자가의 전달자”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일단 노래가 너무 좋아요. 가사도 첫음절을 듣자마자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대학생 김수지(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