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출신 여의사 남쪽서 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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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에서 의사였던 50대 여성이 탈북해 남한에 가서도 의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2010년 남한에 입국한 북한 출신 여의사 최영숙 씨의 이야기입니다.

최영숙 씨는 남한생활 2년 만에 국가고시인 의사면허증 시험에 합격해 지금은 환자를 보고 있습니다.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건 모두 작은 시행착오에 불과했습니다.

최영숙: 처음에는 환자와 얘기 하는 과정에 환자의 눈을 보면 거부감, 이상한 감을 알 수 있었습니다. 환자는 마음의 상태가 중요한 겁니다. 나의 실력은 나중에 알게 될 것이고 처음 만났을 때는 '저 의사가 좋다'. '모든 것에 믿음이 간다'. 이런 것이 환자의 치료에 영향을 끼친단 말입니다. 환자로 하여금 의문이 들게 하는 것은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내가 움직여서 환자를 편하게 하다 보니 내가 좀 힘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억양이나 문화를 떠나서 환자가 자기 가정사까지 말할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됐습니다. 치료는 우선 믿음이 중요한 겁니다. 약 절반, 마음이 절반이란 말도 있잖아요.

보통 탈북자들은 남한입국 이후 3년 정도 적응기간을 거쳐야 비로소 정착을 하게 된다고 일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최 씨는 이런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습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밤 10시 까지 의학서적에 파묻혀 살기를 2년. 수백 쪽에 달하는 영어로 된 16권의 전공 관련 서적을 전부 우리말로 번역해서 공부했습니다. 이런 최 씨의 노력에 감동한 주변인들도 그를 돕기 시작했고 당당히 의사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최 씨는 작은 개인병원에서 일하고 있는데요. 그의 진료과목은 가정의학과입니다.

최영숙: 내가 아프다, 열이 난다, 근종이 있다면 병원을 오게 되죠. 그러면 가정의학과에서는 의사가 보고 자기가 진료를 할 수 있으면 해주고 아니면 전문과에 가야 한다면 증상을 보고 전문의에게 보내게 되죠. 그러니까 1차 진료를 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평일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진료를 하고 나면 퇴근 무렵엔 몸은 파김치가 될 정도로 무너져 내립니다. 하지만 마음이 즐거우니 의사면허를 위해 공부할 때 힘들었던 것과 비교하면 그저 행복합니다.

최영숙: 지금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는 데 육체적으로는 좀 힘듭니다. 왜냐하면 환자를 많이 보면 힘이 드는 겁니다. 환자가 내원하면 전적으로 의사를 믿어야 하는데 그 믿음을 주기 위해 신경을 많이 씁니다. 여기는 한의사는 침을 놓는데 양의사는 안 된다고 하네요. 그래서 저는 전자침을 놓습니다. 기본 통증환자인데 어르신이 많습니다. 젊은 층은 시간이 안 되니까 병원에 많이 못 오고 어르신들은 허리가 아프다, 무릎이 아프다. 어깨가 아프다. 이런 분들입니다. 물리치료를 하면서 약도 주면서 침을 놔주면 좋은 거죠. 처방을 내고 기록하고 다 하니까 힘든데 제가 할 수 있는 것이고 힘들어도 공부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북한에서 임상경험이 30년이라고 말하는 최 씨는 남북한 진료방법의 차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최영숙: 제일 틀리다고 생각되는 것은 환자를 많이 봐야 하는 겁니다. 북에선 환자를 많이 안 봐도 됐거든요. 북한은 환자를 많이 보던 적게 보던 국가 수가를 받습니다. 여기선 하루 60명에서 70명을 개인병원에서 환자를 본다는 인식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처방입니다. 북한에는 약국이 따로 없고 병원 안에 약국이 있는데 여기선 처방전을 가지고 개인 약국을 찾아 가는 겁니다. 그런데 처방을 내릴 때 보험과 비보험이 있어서 환자에게 경비 부담이 없는 적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이해가 안됐습니다.

의료체계나 방식도 그렇지만 개인병원을 찾는 환자의 모습도 달랐는데요.

최영숙: 틀렸죠. 북한은 정말 심하게 아파야 병원에 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병원에 오는 사람은 인상을 찡그리고 배를 움켜잡고 들어온다든가 하는데 여기는 환자가 활짝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잘 부탁한다고 인사말을 하면서 들어오는 거예요. 신기했어요. 일반 개인병원에 오는 사람은 심한 중증 환자가 아니라 만성질환으로 오기 때문에 그런지 좀 틀렸습니다. 우리는 환자가 오면 눈으로 관찰을 하고 촉진도 하고 타진도 하고 청진도 하는데 여기는 환자가 그런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특정 전문분야에서 오래 일한 사람도 남쪽에 가면 그 사회가 요구하는 자격증 또는 면허를 취득해야 일할 수 있습니다. 기자가 알고 있는 한 북한 동의사도 40년 넘게 임상경험이 있었지만 남한에서 치루는 의사면허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안타까워했던 경우가 있습니다. 병과 그 치료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데 거의 영어로 표기된 병명과 치료약 처방 등 방대한 이론을 다시 공부하기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 분의 나이는 이미 환갑이 됐었을 때였습니다.

최 씨는 북한의사가 남한에 가서 진료행위를 하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을 말해줍니다.

최영숙: 남한은 학부를 졸업하면 면허시험을 보는데 실기와 필기를 봅니다. 실기는 환자를 진찰하는 부분, 상담하고 진단서를 내는 법 그리고 필기는 여러 과목에 대한 이해 정도를 보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합격하면 면허를 받습니다. 그리고 전문의가 되려면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런 과정 없이 면허증을 받으면 일반 진료는 할 수 있습니다. 영어는 기본이 돼야하고 그다음은 인내라고 말하는 최영숙 씨. 결코 쉽지 않은 공부이기 때문에 고통을 참아야 하는 순간이 한 두 번이 아입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해내겠다는 의지와 인내가 필요하다고 재차 강조합니다.

최 씨는 의사신분을 되찾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뛰어 오를 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최영숙: 저는 지금 서울대학교 박사과정을 이번 여름에 수료합니다. 그 다음에는 논문을 써야 합니다. 지금은 방학기간이지만 저에겐 방학이 아닙니다. 진료도 하면서 박사학위를 받자면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논문을 쓰기 전에 제가 제1저자로 논문에 참여를 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 편집인이나 통계자료를 정리하던가 그런 과정을 거쳐야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1월과 2월은 전투죠.

제2의 고향 오늘은 북한 출신 여의사 최영숙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