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이 안 되면 경제적으로도 힘들지만 보통 정신적으로도 많이 시달리게 됩니다. 오늘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당당하게 전산실장으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남한생활 5년차의 탈북여성 이미래(가명)씨의 이야기입니다.
이미래: 저는 살아서 한국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신력으로 온 것 같습니다.
이미래 씨는 40대 중반으로 북한에서 보위사령부와 국가보위부 감옥살이를 했던 여성입니다. 죄목은 국가반역과 탈북인데요. 아버지는 고향은 이남입니다.
이미래: 아버지가 제가 보는 앞에서 보위부에서 맞아 비참해진 모습을 보았고 마지막에 내 손바닥에 글을 써주는 것이 한국 가야 산다. 꼭 살아가라고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내가 탈북했는데 중국에서 잡혀 북송 됐어요. 북한에서 공산당 생활을 했고 북한군 생활도 했고 대학공부도 했고 북한에서 공직에도 있었기 때문에 여기 오는 길이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버지 고향이 충청남도...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딸에게 남한으로 가야 살 수 있다는 유언을 남겼고 이후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2007년 이미래 씨는 꿈에 그리던 남쪽 땅을 밟게 됩니다.
이미래: 저는 남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왔어요. 일단 경제적으로 북한 보다는 낫다는 것하고 남한 사람 믿지 말라는 것을 알고 왔어요. 남한에 오니까 죽을 일이 없구나. 열심히 돈 벌어서 자식 데려오고 형제 데려오고 아버지 선산에 모셔야 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난 남한에서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군 생활 7년 했고 북한에서 어느 정도 공부를 했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었어요. 5년 안에 나도 대학졸업하고 집도 사고 딸도 데려오고 남들 타고 다니는 차도 사자고 했는데 그 것을 다 이뤘어요.
나이 40을 넘긴 중년의 여성이 낯선 남한사회에 가서 빈손으로 시작해 자립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는 친척이나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모든 것을 혼자 알아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미래: 처음에는 힘들게 시작했어요. 브로커 비용을 주다 보니 돈이 없었어요. 제가 첫날 아파트 와서 아무것도 없어서 그날 밤 잘 사는 동네로 가서 밥그릇이나 찬그릇 옷장, 이불장 등 처음에는 남이 버린 것 주워서 살았죠. 그러다 두 달 벌어 냉동기 사고, 두 달 벌어서 세탁기 사고 이렇게 1년 반을 버니까 딸을 데려올 수 있는 돈이 모였고 이제는 다 해놓고 삽니다.
기자: 지금은 자가용 굴리고 사는 겁니까?
이미래: 네, 제가 하나원 나와 한 달 수입이 250만원은 된 것 같아요. 1년 반은 강의도 하고 주말에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지금까지 일안하고 집에서 놀아 본 것이 5일도 안돼요. 그리고 부족한 것 따라가자면 4시간 이상을 못자요.
처절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 잠과의 싸움 그야말로 이 씨의 남한 생활은 북한식 표현으로 하루하루가 전투였습니다. 처음 한 2년을 그렇게 일하면서 인터넷 가상공간을 통해 대학공부를 하고 나니 졸업도 하게 되고 자격증도 취득하게 됩니다.
이미래: 8월에 사이버대학 대학원에 진학합니다. 저는 하루도 쉰 적이 없어요. 남한에선 컴퓨터를 모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자격증 공부를 해서 졸업하고 그 학교에 취직을 했어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는 법, 모르면 찾아 배우면 되고 시간이 지나고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손에 익으니 고수가 되는 거죠.
이미래: 제가 일해 보니까 내가 맞추면서 살아야 된다는 거죠. 마음을 비우고 배우는 입장에서 배운 것은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해요. 전 처음에 공문을 하나 작성해도 몇 번씩 다시 만들었고 업무가 시설관리에서 학교 관리 교사 인사관리 등이 모두 총괄인데 전임자가 개인감정을 갖고 나가서 업무 인수인계를 못 받았어요. 그래서 5년 치 장부를 꺼내놓고 두 달을 집에 못 오다 시피 하면서 서류정리 하며 일을 익혔어요. 모르는 것이 있으면 관공서 다니면서 익혔고요 그래서 학교에선 제가 꼭 필요한 사람이 됐죠.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고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면 전문가가 되는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남이 하지 못하는 또는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게 되면 인정받게 되고 직장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면 봉급도 그만큼 더 받게 된다는 말인데요.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이 씨에게 남한정착은 그리 큰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이미래: 자기에게 달렸어요. 문화가 다르고 능력이 다른데 남한에서 생활이 어렵다는 말은 북한에서 놀고먹고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여기서도 기초수급자로 살아요. 저는 놀면 못 견디는 체질이라 6시에 출근에서 자정 무렵에 퇴근해요. 남한에서 공부하고 일한다는 것이 시간이 투자되고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가 근무하는 곳에 탈북자는 저 혼자예요. 항상 탈북자들이 저를 보고 따라 배운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활 했어요. 탈북자 모범이 된다는 것이 힘들지만 그렇게 애쓰니까 되더라고요.
탈북여성들의 봉사단체 회장이기도 한 이미래 씨. 그는 정착이 서툰 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탈북자들의 성공한 탈북자로 열심히 사는 탈북자로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그래서 항상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마음으로 말과 행동 하나하나도 조심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이미래: 주어진 현실에 충실 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봅니다. 직업이 있고 자식이 있으니 모두에 충실하고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행복인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사랑이란 것이 받는 것 인줄 알았는데 베푸는 것 사랑이 희생이란 것을 알았어요. 남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찾아서 하는 것이니 힘들어도 즐겁고 그것이 행복인 것 같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이미래(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