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아-‘자유 찾아 천만리’

탈북자 출신 지현아 국제 펜(PEN)클럽 망명북한작가 PEN센터 이사가 '북한인권영화제 2014'에서 관객들과 만남의 시간을 갖고 있다.
탈북자 출신 지현아 국제 펜(PEN)클럽 망명북한작가 PEN센터 이사가 '북한인권영화제 2014'에서 관객들과 만남의 시간을 갖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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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탈북여성 작가 지현아 씨가 자신이 쓴 탈북체험수기 ‘자유 찾아 천만리’ 출판회를 가졌습니다. 함경북도 청진 출신으로 3번의 북송 4번의 탈북 그리고 북한의 감옥에서의 인권침해에 대해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현아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지현아 씨가 탈북하게 된 것은 고난의 행군 때인 1998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현아: 처음 탈북 동기는 아버지가 중국에 친척방문을 갔다가 고모 집에서 남한 라디오를 듣고 북한 체제가 우리를 속이는 정권이란 것을 깨닫고 우리 가족을 설득한 거죠.

처음에는 식구 모두가 반대 했지만 중국에 가면 이밥에 고깃국 먹는다는 말에 결국 도강을 하게 됩니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간장, 된장을 만드는 원료기지에서 일하다가 중국으로 갑니다. 그런데 잡혀 나오길 3번. 마지막 북송에선 교화소까지 가게 됩니다.

지현아: 증산 11호 교화소에서 1년 형을 받고 들어가 김정일 생일을 맞아 대사령으로 8개월 만에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그렇게 살아 나와서는 다시 탈북을 하고 결국 2007년 남한입국에 성공하는데요. 당시 29살 지 씨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자신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곳이었습니다.

지현아: 같은 나라인데 정말 내 나라가 맞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극과 극의 모습이었습니다. 중국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우리글이 써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면서 천국에 왔구나. 이제 다시는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보통은 의욕이 넘쳐서 자본가 정주영 회장처럼 부자가 되기를 꿈꾸거나 또는 반대로 잔뜩 주눅이 들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에 숨게 되는데요. 지 씨는 어린아이처럼 온통 궁금한 것뿐입니다.

지현아: 북한에는 장작으로 밥을 해먹으니까 산에 나무가 없는데 여기는 산에 나무가 많은 거예요. 이 사람들은 어떻게 밥을 해먹지? 궁금한 것이 정말 많았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어떻게 찾을지 또 애가 아파서 병원 가야 하는데 나 같은 평민이 구급차를 불러도 될까? 이런 생각을 했고 감사한 마음이 먼저였습니다.

처음에는 물고기를 요리하는 횟집에서 일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자격증 시험 준비도 하게 되는데요. 남한 사회에선 무엇보다 넘쳐나는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컴퓨터 학원엘 가게 됩니다. 이곳에서 자신감을 찾게 되는데요.

지현아: 컴퓨터 학원에 가서 6개월 공부를 하는데 저만 탈북자였는데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모든 사람은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고 잘하는 것이 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못해서 온 것이 아니고 잘 몰라서 이곳에 왔다 우리 한 번 잘하는 사람들을 뛰어 넘어보자 이런 말씀을 하는 거예요. 저는 다른 사람보다 더 몰라서 고민을 했는데 선생님 말씀이 떠올라서 용기를 얻었고 북한에서 어려운 고난을 다 넘기고 왔는데 내가 못할 것이 뭐인가 이런 맘으로 극복한 것 같습니다.

지현아 씨는 인간의 권리와 자유는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책이나 사람들과의 만남이 아닌 생활에서 자연스레 깨달게 됩니다.

지현아: 제가 처음 와서 교회를 갔는데 북한에서는 신앙인이라도 종교생활을 할 수 없는데 이곳에서는 종교 생활을 할 수 있고 대통령에게 존칭어를 붙이지 않아도 잡아가지 않으니 자유로운 세상이란 것을 알았고요. 광우병 파동으로 많은 사람이 시위를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죠. 북한에서 같으면 탱크로 밀어버렸을 텐데 경찰을 동원해 정리하는 것을 보고 이런 것이 인권이고 자유구나 하는 것을 알았죠.

전남대학교 2학년인 지현아 씨. 나이가 전부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대학졸업 시기를 한참 넘겨 버렸고 그사이 가정도 꾸렸기 때문에 남한에 왔을 때 가졌던 정치부 기자의 꿈은 잠시 접어 두고 작가의 길을 가리고 했습니다. 그리고 탈북 예술인들과 연대해서 북한인권을 알리는 일에도 적극 동참하고 있습니다.

지현아: 지금은 학교생활보다는 작가 활동을 비영리단체에서 하고 있고요. 국제펜클럽 작가로 활동하면서 김규민 감독이랑 함께 자유통일문화연대에서 탈북자 예술인들과 북한에 대해 자유를 촉구하고 북한인권상황을 영화나 글로 알리는 활동하고 있습니다.

북송당해 교화소 생활에서 숱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지 씨는 결심합니다. 내가 감옥을 나가면 이런 참상을 꼭 세상 사람에게 알릴 것이다. 지 씨는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현아: 네덜란드 시인이 말하길 “감옥의 문은 밖에서 열어야 한다.” 북한 주민들은 큰 항아리 안에 갇혀있고 자유가 뭔지 인권이 뭔지 북한에서는 가르쳐주질 않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밖의 세상을 한 번 보면 자유와 인권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선전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도 북한에 있었으면 갈 수 없는 미국이나 홍콩에 갔다 왔고

세계 여러 나라들을 다니면서 북한이 한 개의 감옥이나 같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빨리 감옥의 문을 열어서 북한 주민이 하루빨리 세상을 옳게 볼 수 있는 그런 일을 하려고 합니다.

지 씨는 지금 자신의 첫 번째 시집인 ‘마지막 선물’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준비 중입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작가 지현아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가 쓴 자유 찾아 천만리가 어떤 책인지 좀 더 자세히 전해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