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의 부모들은 대개 자식이 일류 대학에 갈 수만 있다면 모든 희생을 감수하겠다고 들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비싼 등록금을 내도 대학 뒷바라지는 하겠다는 거죠. 그래야 남은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지 보다 자기 적성을 살려 재밌게 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탈북여성이 있습니다. 바로 박영순(가명) 씨인데요. 오늘은 남한생활 10년차 박 씨의 이야기입니다.
온성이 고향이 박영순 씬 1999년 어린 아이 셋과 남편 이렇게 다섯 식구가 모두 함께 탈북했습니다.
박영순: 10년 전에만 해도 상황이 괜찮았습니다. 지금 같으면 다섯 식구가 전부 넘어 온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죠.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가서는 주인에게 아무런 요구도 못하고 그저 아이들이 하루 세끼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면서 농사일에 지쳐 집에 오면 쓰러져 자기 바빴습니다. 그때는 큰 딸이 8세, 막내가 갓 태어났을 때니 지금 다 큰 아이들을 보면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느끼게 됩니다.
기자가 전화를 했을 때 박 씨는 일을 쉬고 병원에 간다고 했습니다. 아마 중국에서 얻은
신경성 위염이 제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는데 중국에서는 아파도 병원을 찾을
형편이 안됐다며 중국에서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박영순: 중국 흑룡강성 영화사란 곳인데 아주 시골입니다. 내가 북한에 있을 때 맹장이 좀 아 아팠는데 젖먹일 때 수술하고 약을 먹으면 아이한테 영향이 있다고 해서 참았어요. 근데 중국에 와서 막 맹장이 터질 지경이었어요. 병원에 가야 하는데 말도 모르고 돈도 없고 해서 신랑남편 외사촌이 돈을 주인에게 주기로 하고 내가 말을 모르니까 조선족이 하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중국에서 4년을 그렇게 살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고 택한 남한 행.
박영순: 우리도 갈라져서 들어왔습니다. 중국까지는 같이 들어왔고 한국 오는 것은 몽골로 다 같이 떠났다가 못가고 다시 흑룡강으로 와서 애들이 어리니까 갈라져서 들어왔어요. 아들이 5살인데 내가 업고 오고 딸 둘은 신랑이 데리고 베트남으로 해서 나보다 한 달 늦게 들어왔어요. 그래서 여기서 만났죠.
2002년 가을 남한에서 박 씨 가족은 다시 상봉했고 사회적응교육시설인 하나원을 나와
가족이 본격적으로 남한생활을 시작한 것은 2003년.
남편은 철물 기술을 배워 기술자가 됐고 박 씨도 인쇄공장, 일회용 라이터 생산 공장 등 주로 제조업 분야에서 일했습니다. 큰돈은 못 벌어도 일을 손에서 놔 본적은 없습니다.
박영순: 커튼 샘플 북 만드는 겁니다. 지금 하는 일은 편합니다. 일하는 사람이 다 여자인데 할 만 합니다.
기자: 봉급도 괜찮고요?
박영순: 우리 회사가 사회적 기업인데 월급은 한 달에 100만원이고 월요일부터 금요일
까지 5일 근무고 공휴일은 전부 쉬죠. 야간 하고 특근하면 1.5배를 주는데 4대 보험 공제
하고 특근 야근해서 100만원은 가져오죠. 40대 중반이 되니까 일이 힘든 것은 겁이
안 나지만 옛날처럼 힘들게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요.
맞벌이 부부로 아이들 교육에 많이 신경을 못 쓴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도 아무 탈 없이 잘 자란 아이들을 보면 얼마나 고마운지. 큰 딸은 올해 대학 졸업반입니다.
박영순: 여기 보면 북한에서 와서 속 썩이고 잘 못된 아이도 많아요. 그런데 우리 애들은 하나도 속 안 썩이고 맞벌이 하니까 내가 아침에 나가면 자기들이 밥해먹고 지금은 아르바이트해서 자기 용돈 벌고 하니까
기자: 미용을 하는데 대학을 가면 더 좋습니까?
박영순: 고등학교부터 학교에서 배우고 실습하고 학원 안다니고 자격증 다 따고 했어요.
기자: 대학도 그런 학교를 갔잖아요.
박영순: 대학 4년제 갈 필요 없다고 하면서 2년 대학을 갔어요.
기자: 학원 다녀서 미장원 차린 사람과 다른 것이 있나요?
박영순: 틀리죠. 학교 때부터 기초부터 이론 공부를 했으니까 다르죠. 큰 애는 학교 때부터 과대표도 하고 총무도 하고 간부학생이었어요. 그리고 상도 많이 받았어요.
기자: 그러면 취업이 잘되는 겁니까?
박영순: 그렇죠. 학교에서도 교수님들이 관심을 많이 갖고 있더라고요.
둘째 딸도 언니 따라 미용을 공부합니다. 학교가 끝나면 동네 미용실에 가서 보조 일을
하는 것이 대견스럽기만 합니다.
박영순: 우리 둘째도 미용을 하겠다니까 하는 거죠. 아플 때는 좀 쉬라고 해도 자기가 좋아서 하니까 말리진 않아요. 그런데 자기 친구들이 다 대학을 가니까 자기도 가고 싶어 하는 눈치더라고요. 올해는 늦었고 내년에 대학에 보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제 고등학생이 된 막내아들만 제 몫을 해주면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아빠를 닮아서
그런지 유난히 기계 고치는 일을 재밌어 한다는 박 씨.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과대학에 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남한에서 10년을 사는 동안 남편이 동업으로 중국에서 가죽 사업을 한다고 했다가 한 번 사업실패를 본 것 말고는 순탄했다고 말하는 박 씨. 이제 40대 중반을 넘어서 힘든 일은 할 수 없다며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박영순: 앞으로 계획은 아이들이 잘 자리를 잡아서 시집 장가 잘 갔으면 좋겠고 여기는
특히 남자가 직업이 좋아야 장가도 가고 하니까 아이들 잘 되는 것이 바람입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박영순(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