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고향] 아들 보면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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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사는 북한출신 젊은이들은 많은 수가 대학에 가서 자기가 원하는 공부를 합니다. 물론 탈북자의 대학등록금은 남한 정부에서 지원을 해주니까 남한의 일반 주민들처럼 등록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잠시 하고 싶은 공부를 뒤로하고 자연의 순리대로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가정을 꾸미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은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탈북여성 홍은희(가명) 씨의 이야기입니다.

홍은희: 신랑이 요전에 밥 먹기 싫다고 만두 좀 해달라고 해서 해줬는데 자기는 이제 만두만 먹겠대요.

이제 남한 생활이 2년째 접어드는 홍은희 씨. 18살에 탈북해서 중국에서 5년을 살다가 남한행을 택했습니다. 고생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말하는 홍 씨. 같은 북한출신 남성을 만나 신혼살림을 차리고 바로 그 다음해 아들을 순산했습니다. 아직 한 살이 안 된 아이가 옆에서 옹알거리는 모습을 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지만 한편 아쉬운 생각도 있습니다.

홍은희: 제가 배우고 싶은 것이 많거든요. 어느 것을 해야 할지 쉽지 않습니다. 요리학원을 다니고 싶기도 하고 아직 한국 사회 정착을 완전히 했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신랑은 배달일 하면서 배우고 저도 아이 키우면서 생각을 좀 해보고요. 아이가 크면 저도 배우러 다닐 겁니다.

북한출신이 남한에 가면 자기가 배우고 싶은 것을 찾아 학원엘 많이 다닙니다. 배우는데 드는 학원 비용은 5년 동안 정부가 지원합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장려금 명목으로 받게 되는데요. 학원에서 직업훈련을 받게 되면 최대 240만 원까지 미국 돈으로 하면 2천 달러가 조금 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자격증을 따면 200만 원 정도 정부로부터 받습니다.

만약 직장을 잡아 취업이 되면 최대 금액이 1,800만 원 정도 약 1만 6천 달러를 받는데 일 년 단위로 받게 됩니다. 1년을 마치면 550만 원, 2년을 마치면 600만 원, 3년을 마치면 650만 원을 탈북자는 정부에서 장려금으로 받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하루빨리 남한사회에 정착하도록 정부가 탈북자에게 주는 특별혜택입니다.

잠시 얘기가 옆길로 셌는데요. 현재 홍 씨의 남편은 트럭을 몰고 음식점에 물건 배달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 달 수입이 미국 돈으로 하면 1천 200달러 정도 됩니다. 하지만 남한 물가가 워낙 비싸 생활이 그리 넉넉한 편은 못된다고 합니다. 오전 7시 남편이 출근을 하면 그때부터 아이를 돌보는 일이 홍 씨가 하는 일. 어떻게 하면 더 잘살 수 있을까 궁리도 해봅니다.

홍은희: 저희 신랑은 남 월급타면서 일하는 것보다 자기 개인사업을 하는 것이 더 발전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면 바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돈도 좀 모아놓고 자기 의견이 뚜렷할 때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으로 뭔가 하려고요. 식당은 나도 음식에 취미가 있으니까 배우면 잘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탈북해서 중국 생활을 하면서 중국말을 어느 정도 익혔다는 홍 씨는 올해는 중국어 자격증 시험을 보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학원도 안 다니고 어떻게 시험을 보겠다는 것인지 기자가 중국에서의 생활과 남한생활 이야기를 두서없이 물어봤습니다.

기자: 중국에서는 학교를 다녔나요.

홍은희: 학교는 안 다니고 시내에 나와 일했는데 제 또래 아이들이 다 휴대폰을 쓰는데 어울리다 보면 말도 알아듣게 됩니다. 제가 중국에서 제일 후회된 것이 못 배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가면 무조건 공부를 하려고 했습니다. 무엇이든 배우려고 했습니다. 4년제 대학이 아니면 2년제 대학이라도 다니려고 했습니다. 그게 제 꿈이었습니다. 지금은 아이도 있고 하니까 배우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야지요.

기자: 남한에서 대학에 들어가려면 북한에서 고등중학교 졸업장을 땄어야 하는데 북한에서 졸업은 했습니까?

홍은희: 북한 사람들은 고등학교 졸업했다고 해도 옛날처럼 온전히 다니질 못했습니다. 저희 때부터 미공급 됐거든요. 그래서 학교 다니는 출석률이 낮습니다. 그리고 학교가면 배워주는 것보다 일시키는 것이 더 많습니다. 무료교육이라고 하지만 학교에 흰 종이를 내라고 할 때도 있고, 휘발유 내라고 하고 돈 내라고 하고 오후 되면 농장 가서 김매기 안든지 아니면 모내기 하고 도로공사하면 공사장 자갈 나르기, 모래 나르기 저희가 다합니다.

기자: 북한에서도 살았고 힘든 중국 생활도 해봤고 어렵게 간 남한에서도 이제 1년을 살았는데 남한생활 해 볼만 합니까?

홍은희: 오히려 나약해진 감이 듭니다. 신랑이 있으니까요. 내가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는 것은 힘들겠죠? 혼자서 애를 키웠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까? 중국에 있을 때는 한 달에 2번 휴식했습니다. 그런데 노는 것이 싫어서 일했거든요. 세차 일을 했는데 식당일보다 좋았습니다. 설날에도 세차하고 했는데 한 달 월급이 중국 돈으로 2천5백 원 받았거든요. 그런데 북한에선 더 고생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한국에서 그만큼 열심히 하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많은 탈북자들이 가족이 남한에 없어 외롭다고들 하는데 그런 것이 힘들진 안으세요? 홍은희: 저의 같은 경우는 누가 옆에 있어서 힘들지 않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북한에서 그러잖아요. 자력갱생 이러잖아요. 혼자서도 얼마든지 열심히 살아요. 친척이 없으니까 못살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외로운 것은 없습니다. 놀기는 좋아하지만 남의 집 찾아가는 것도 그렇고 돌아다니는 것도 싫어합니다. 집에 있으면 저 혼자 조용히 있습니다.

기자: 어떤 때 행복을 느끼세요?

홍은희: 아이랑 있는 것이 제일 행복해요. 그리고 아이 물건을 사는 때 너무 좋습니다. 남이 하는 것만큼 저도 아이에게 해주고 싶습니다. 조금 크면 학원도 보내야 하잖아요. 지금은 좀 나약해지다가 아이 유아원 보낼 때부터는 열심히 하려고요. 제가 걱정되는 것은 학교 문제입니다. 학교생활 잘할까? 내가 벌어서 남부럽지 않게 아이 학원도 보내고 해야 하는데 그런 근심이 됩니다.

기자: 남편분이 애정 표현은 잘 합니까?

홍은희: 신랑은 자주 표현합니다. 너 잘해주겠다 이런 소리하고 좋죠. 열심히 살아주면...열심히 안 살면 아이 데리고 제가 일해야 되잖아요.

기자: 이제 남한에서 하고 싶은 것은 어떤 것입니까?

홍은희: 제 꿈은 대학가는 겁니다. 아니면 기술이라도 배우는 것이요. 뭐 하나라도 잘하는 것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제생각대로 안됐습니다. 제 고민이 그겁니다. 일은 무섭지 않습니다, 배워만 주면 다할 수 있는데 내가 뭘 잘하는지 딱하나 말하라고 하면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홍은희(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