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에서의 직업을 남한에 가서도 계속 이어가기란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자신이 북한에서 한 일과 비슷한 직종에서 직업을 찾습니다. 오늘은 북한에서 교사로 25년 생활하다 탈북한 김희선 (가명)씨의 이야기입니다.
김희선: 나의 처지에서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 선택을 잘하고 목표를 향해 꾸준해야한다 말입니다. 자꾸 맘 바꾸면 안 되고.
함경북도 출신의 김 씨는 2005년 탈북해서 중국 생활을 거쳐 2007년 남한에 갔습니다. 북한에서 당원이었던 그는 자신이 탈북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던 겁니다.
김희선: 많이 사람들이 자본주의화 됐을 때거든요. 북한은 직업이 있으면 잘 먹고 잘살잖아요. 고난의 행군 때도 중국에서 쌀 부식물 먹는 것 입는 것 거기서 실어 내오다 보니까 힘든 것 모르고 살았어요. 북한의 정치가 순간에 죽거나 망하잖아요. 나도 추방당해 산골에 살다보니까 그 땅에선 있을 수가 없더란 말이에요. 떠날 때는 중국 가서 살자고 떠났는데...
국경연선에 살다보니 어려운 줄 몰랐는데 말실수를 하는 바람에 지방으로 추방을 당했고 그러면서 탈북을 결심했던 겁니다. 그때가 40대 후반에 접어들어 남한에 갔을 때는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했습니다.
김희선: 한국에 오자마자 디자인 학원을 갔어요. 거기 선생님이 교육하는 것이 우리가 못살 때 돈 벌겠다고 미국에 간 교수, 박사들이 화장실 청소부터 한 사람은 다 성공했는데 내가 박사가 됐다고 거기 가서 뒷짐 지고 다니던 사람들은 다 실패했다. 그러니까 탈북해 여기 와서 잘살려면 일을 가리지 말고 해야 한다 했는데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저는 화장실 청소 설거지 가리지 않고 했는데 이제 제 나이 60살이 다 되가는데...
몸에 베어버린 습성과 가지고 있던 생각을 모두 버리고 남한에서 보고 배우는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부산이라는 국제무역항이 있는 도시에서 지역신문을 만드는 편집장이 됐습니다. 격주로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요. 취재부터 인쇄과정까지 총괄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쉽지 않았는데요.
김희선: 어려움은 제가 이만한 일을 짧은 기간에 할 수 있기까지 어려움은 컴퓨터 배우는 일이 힘들었어요. 컴퓨터 학원을 오전에 다니고 그것 끝나면 4시부터 또 다른 학원에 다니고 7부터 10시까지 알바를 했어요. 그래 돈을 벌어서 계속 공부를 했단 말이예요. 지금은 동영상 편집을 하고 타자는 300자를 치고요. 20대 어린 아이들과 공부를 하다 보니 따라가기 힘들었어요. 점심시간에도 혼자 밥 먹으니까 외롭고 쓸쓸하고 그랬는데 긍정적으로 넘겨서 그런지 가슴에 응어리지고 그런 일은 없어요.
요즘은 간단한 문서작업도 모두 컴퓨터로 하기 때문에 사무직 일을 하려면 컴퓨터 이용방법을 모르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잘 알았던 김 씨는 컴퓨터 관련 자격증을 따기 시작했고 기본 수준에 도달했을 때 취업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아픔이 따랐습니다.
김희선: 한국에서 나서 자란 사람은 월급을 200만 원 받는다면 저는 100만원 받았어요. 그래도 나이 먹었지만 젊은 아이들과 일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 맘이 아팠어요. 우리가 그렇게라도 돈을 벌어야 북한에 보내 가족을 살릴 수 있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아쉬움이 많았어요.
김 씨가 북한출신이었기 때문에 남한사람과 달리 차별을 받았다고 보기 보다는 경험이 적어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어찌됐건 김 씨는 포기하지 않았고 성실함으로 버텼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편집장이 될 수 있었을 텐데요. 김 씬 남한생활에서 컴퓨터 자격증만 딴 것이 아니라 대학도 졸업한 어엿한 학사출신입니다.
김희선: 온지 얼마 안됐지만 그만하면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또 여기 와서 대학도 두 곳이나 나왔잖아요. 선교대학 2년하고 부산디지털대학 4년제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인터넷으로 공부하고요. 선교사 공부는 나중에 통일 된 다음 도움이 될까 해서 했고 사회복지는 내가 교사일과 연관이 돼서 했고요. 그래서 지금 봉사활동 많이 하고 있어요.
낮에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컴퓨터 가상공간 즉 인터넷으로 수업을 받는 통신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김 씨는 신문을 만드는 일 외에 통일관련 강의도 나가고 있는데요. 주로 학교에 가서 남북한 사회제도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는 겁니다. 아무래도 교사 출신이기 때문에 아이들을 보는 눈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데요.
김희선: 학습이 있을 때 가보면 아이들이 복도에서 손들고 벌서고 있어요. 북한에선 그런 것이 없거든요. 북한에서 말하기를 남한에선 아이들을 걸상에 올려놓고 벌세운다고 했는데 진짜 와보니 그렇더라고요. 또 피곤하다고 하면 선생님은 졸리는 학생은 조용히 좀 자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게 안돼요. 45분 수업은 선생님께 집중을 해야 해요. 자유라고 해서 그렇게 한다고 하는데 교육에서는 정서가 우리하고 또 달라요.
남한의 모든 것이 좋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아침 출근시간 지하철에서 화장을 하는 여성을 볼 때면 10분만 빨리 일어났어도 집에서 화장을 하고 나올 수 있을 텐데 라며 아직까지도 그런 모습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진다고 합니다. 어느 사회나 장단점이 있듯 그가 말하는 남한생활 8년은 대체로 만족입니다.
김희선: 자기가 벌면 번 것만큼 월급을 주잖아요. 그러니까 굶어 죽거나 헐벗는 그런 지경은 아니잖아요. 북한은 일을 해도 월급을 안주고 배급을 안주잖아요. 여기는 일한만큼 차려지니까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자유가 있고 또 잘산다고 해도 누가 사회주의 했다고 잡아가고 단속하고 그런 것이 없잖아요.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고 학교도 다니고 싶으면 자기가 맘대로 선택해서 다닐 수 있잖아요.
보통 40대 이상부터 60대 환갑 전까지 분들은 일자리가 없어 힘들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남한에 간 북한출신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현상인데요. 그런데 김 씨는 이것도 긍정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김희선: 50대 이상이 할 수 있다면 아르바이트 아니라도 있어요. 여기 부산에는 오뎅공장도 있고 자동차 부품공장도 있어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요. 그런데 탈북자도 그렇고 한국 분들도 천한 일이라고 잘 안 해요. 인간으로 살면서 능력이 안 되고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일이라도 해야 하는데 안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런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하면서 살았거든요, 왜냐하면 대학 다니면서는 알바를 해야 하잖아요. 식당일도 뭐 북한에서 비하면 신선놀음인데도 힘들고 천한일이라고 안하더라고요. 내가 좋아해서 힘들 것을 못 느끼고 살고 있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교사출신의 탈북여성 김희선(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