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와 제빵기술 가르쳐요

현대호텔관광직업전문학교에서 제빵 기술을 배우고 있는 탈북자들.
현대호텔관광직업전문학교에서 제빵 기술을 배우고 있는 탈북자들. (사진-김은영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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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간 탈북자들은 각종 직업훈련학교를 통해 취업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이 다니던 학교에서 졸업 후 교사가 돼 후배 탈북자들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오늘은 요리와 빵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는 탈북여성 조미란 (가명) 씨의 이야기입니다.

조미란: 한국에 오기 위한 것은 아니고 생존을 위해 중국으로 갔던 거예요.

조미란 씨는 올해로 남한생활 5년차가 됩니다. 그가 고향을 떠난 것은 2003년인데요. 살던 곳이 중국과 가까운 곳이라 내륙지역 보다는 탈북자가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탈북 당시의 얘기 좀 들어보죠.

조미란: 고난의 행군 한고비는 넘었어도 살기 힘들었죠. 배급도 안주고 남자는 일 나가지 않으면 감옥가고 한쪽에서는 계속 도강 하는 사람이 생기고 일단 돈도 없고 쌀도 안주니까 막연했죠.

기자: 바로 국경지역이라 도강하고자 하면 할 수는 있었군요?

조미란: 물이 무릎아래고 거리도 가까운 곳인데 도강을 하자는 마음을 결정하는 것이 어려웠어요. 친구들이랑 동내 사람들이 많이 가는데 용기를 못 내겠더라고요. 나라를 버린다는 것이 그때 당시엔 이해가 잘 안됐죠.

중국으로 가서는 그곳에서 6년 가까이 살다가 남한으로 갑니다. 중국에서 살기가 좋았다면 남한으로 갈일도 없었겠지만 불법신분으로 숨어 산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남한에 도착한 것은 늦가을 이었는데요. 시기적으로 한해를 마무리 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조민란: 10월에 나오면 연말이라고 해서 교육받을 것이 마감돼서 없어요. 봄까지 기다리는 중에 요양보호사 공부도 하고 자동차 운전면허도 취득하고 2월부터 직업훈련과 대학 공부를 동시에 시작했어요. 대학공부 끝나고는 바로 취직을 하고요.

기자: 북한에서는 직업이 뭐였나요?

조미란: 북한에서는 대학도 못나왔고 거기서는 꿈도 없고 미래도 없고 아침 먹고 점심에는 뭐 먹을까 그랬어요. 처녀 때는 품질감독원이라서 편하게 살았는데 시집가서는 장사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중국에 있으면서는 그냥 숨어 살아야 하고 개가 짖으면 뒷문으로 뛰어야 하고 한족이나 교포들은 신고를 하고 그런 생활을 더 이상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죽더라도 한국으로 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중국을 떠나 다시 제3국을 거쳐 남한으로 가는 길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쉽지 않았습니다. 또 그 와중에 한국정부에서 탈북자를 받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도 있었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걱정했던 일들이 다 잘 풀려 신분보장을 해주고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수 있게 초기정착을 도와주는 남한 땅을 밟게 됩니다.

조미란: 가자고 왔고 와서는 진짜 열심히 살았어요. 저희 집과 학교 거리는 두 시간 반 정도입니다. 아침 6시에 출발해서 직업훈련 받고 대학공부 10시에 끝나 집에 오면 12시 반. 그런데 북한과 다른 점이 아부아첨이 아닌 내 노력이면 되더라고요. 학교에서 바로 반장이 되고 4개월 지나 면접을 보고 직업훈련 6개월 끝나고선 취직해 지금껏 일하고 있습니다.

기자: 원래 관심이 있는 분야였나요?

조미란: 전혀 아닙니다. 직업훈련을 받게 됐던 것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친구 소개로 탈북자 단체에서 직원을 모집한다고 해서 갔어요. 제가 하나원에 있을 때도 글쓰기를 잘해서 최우수상도 받고 했거든요. 탈북자 단체 일을 하려면 글을 잘 쓰면 된다고 해서 갔는데 친구는 북한에서 학교를 졸업해서 되고 저는 중학교 졸업자라고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생각한 것이 학력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

세상에서 제일 좋은 냄새라고 하면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고기 굽는 냄새, 빵 굽는 냄새가 좋다고 합니다. 조미란 씨는 북한에 살 때만 해도 장마당에서 카스테라나 속빵, 증기빵을 보긴 했지만 식량을 샀으면 샀지 돈 주고 빵을 사먹을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는데 이제 맛있는 빵을 굽는 법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직업입니다.

기자: 자기가 만든 빵이 맛있던가요?

조미란: 그때는 맛을 모르고 먹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알겠더라고요. 지금은 빵이 없으면 생각도 나고 내 빵이 맛있네, 이럴 때도 있고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직업훈련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주말에는 남한생활을 알아 가는 데 씁니다. 산과 들과 바다를 찾다 다니며 세상을 배우고 있는데요. 아직은 남한생활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배우는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조미란: 쉬는 날은 친구들과 등산을 간다든지 여름에는 멀리 가서 먹고 즐기고 하는 것에 모든 곳을 쏟아요.

기자: 남한생활이 북한과 많이 틀립니까?

조미란: 많이 틀려요. 우리가 서로 말이 통해서 잘 아는 것 같지만 문화 차이가 너무 난다는 것을 느꼈고 우린 북한에서 오로지 김일성 김정일만 알았기 때문에 우리 역사를 모르고 해서 남한 사람들 만나서 왜 우리 역사를 모르는가 하는 말을 듣기 싫어서 아직까지 알아야 할 것이 많아서요. 공부는 등산하고 노는 시간 빼고 주말은 공부하는데 다 쓰고 있습니다.

북한에는 평범한 가두여성으로 하루하루 끼니걱정을 하며 살던 조미란 씨.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은 다 옛이야기가 됐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숨어 살던 기억도 이젠 더 열심히 살아야 된다는 채찍이 돼서 조 씨를 자극합니다. 남한생활이 좋은 것은 모든 것이 자신에게서 시작돼 결국 자신에게로 고스란히 돌아온다는 겁니다.

조미란: 일단 남한에 온 것에 감사하다고 생각한 것이 내가 노력한 것만큼 인정을 받을 수 있어요. 북한에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고 하지만 여기선 내가 한 것만큼 보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좋죠. 노력했으니까 보수 올려주라고 하면 다시 연봉을 책정해 주겠다고 해요. 북한을 떠났을 때는 돈 벌어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다시 못 간다고 생각했을 때는 마음이 무너졌어요. 힘들어 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내가 상담을 해줘서 아이들이 취직한다고 하는 모습을 보면 제가 감사한 거죠.

나이는 50대를 바라보게 됐지만 이제 꿈도 생기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아졌습니다. 공부도 더 하고 싶고 언젠가는 노인을 위한 요양시설을 운영한다는 계획도 세워봅니다. 인생이 달라진 겁니다.

조미란: 지금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탈북자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잘 살 수 있는가 그런 일하는데 사회복지 공부를 많이 해서 나이 먹어 오신 분들, 가족 없이 온 분들이 여기서 어려움 없이 살 수 있게 봉사하면서 살고 싶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요리와 제과제빵을 가르치는 탈북여성 조미란(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