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에서는 일반 노동자이든 당원이든 자신이 원하는 직장에서 일할 수 없고 당이 알아서 배치를 해줍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 여하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폭이 넓어집니다. 이러한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고 말하는 탈북자가 있는데요. 올해 74세인 전진(가명)씨가 그 주인공입니다. 오늘은 남한생활 10년차인 전 할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전진: 10대에 왔었다면 사업가가 되고 싶었을 겁니다.
2003년 남한에 입국해 올해로 꼭 10년이 되는 전진 할아버지는 젊어서 남한으로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북한에서는 안전원으로 일하다 탈북을 하게 됐는데 당시 괄괄했던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말실수를 했던 것이 그의 운명을 갈랐습니다.
전진: 1999년에 비서에게 당비 받치러 갔다가 당비를 좀 더 내라는 말에 화가 나서 어떤 놈이 그런 지시를 내렸는가? 했더니 내말에다 김정일이란 말을 덧붙여서 보위부에 고자질을 해서 내 목숨 살자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북한에서 했던 일은 남한으로 치면 경찰쯤 되는데 남한에서 원하는 직업을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사업가나 정치인으로 경찰은 하기 싫다고 합니다.
전진: 북한에서 너무 힘들었어요. 북한의 경찰은 자기 주먹이 세고 몸이 빠르지 않으면 골목에서 얻어맞습니다. 항상 체력을 단련해야합니다. 정말 힘듭니다. 나도 군대에서 특수부대에 있었기 때문에 버텼지 어려워요. 북한의 경찰은 남한 경찰보다 주먹이 세야합니다. 남한 경찰들 하는 것을 보면 별로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환갑 나이를 훌쩍 넘기고서 도착한 남한에서의 10년 세월. 제일 좋다고 느끼고도 나이 때문에 누리지 못한 자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전진: 내가 후회를 하는 것이 10년만 빨리 왔어도 원하는 일을 한 번 해보겠는데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선 직업선택이 자유롭다는 것이 맘에 와 닿습니다. 북한에서는 숱한 청년이 자기 희망을 포기하고 인생을 스스로 끊습니다. 내가 아오지 탄광에서 비서로 일하면서 젊은 아이들 일을 시켜 봤는데 배경이 좋은 자녀는 몇 달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가는데 노동자 출신이면 여생을 탄광에서 살아야 하니까 힘들어합니다. 북한은 직업선택의 자유가 없습니다.
기자: 2003년 한국 도착했을 때 연세가 어떻게 됐었나요?
전진: 62세였습니다.
기자: 은퇴할 연세여서 직업을 찾기 어려웠겠습니다.
전진: 여기 와서 직업 없이 살고 있습니다.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정부에서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기자: 시간은 어떻게 소일하세요?
전진: 지금 성경책에 빠져 있습니다. 내가 탈북 했을 때 김일성이 성경을 자기 사업에 참고를 했다는 것을 알고 왔습니다. 그래서 성경 문구를 하나, 하나 보면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심심하니까 이런 것을 하는데 집에 가만히 있으면 술 먹을 생각만 나고 하니까 머리를 쓰는 일을 하자 해서 성경을 봅니다.
기자: 한국에 있는 같은 연령대의 분들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시나요?
전진: 여기 노인들은 복지관에서 놀고 거기서 점심 먹고 합디다. 그런데 난 마음은 아직 젊으니까 그런데 끼고 싶지가 않아요.
기자: 방송을 듣는 북한주민들은 환갑 넘어 한국 가면 어떻게 살까 걱정을 많이 하시지 않겠습니까?
전진: 그렇죠. 그렇게 생각하죠. 나도 한국에 오자고 2002년 중국에서 남한으로 가자고 결심을 했죠. 그러면서도 내가 이 나이에 한국 가서 무슨 일을 하겠는가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힘이 있으니까 막노동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온 겁니다. 와 보니까 힘으로 할 일이 없었습니다. 다 굴착기 또는 기계가 힘든 노동을 해주니까 현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걱정을 했는데 국가에서 수급자로 지정해서 생활비를 줍니다. 나이 먹어 오는 사람은 살기 더 좋습니다.
남한도 경기가 나빠지면서 전 세계 다른 나라들처럼 신규 일자리 수가 점차 줄면서 대학을 졸업한 청년 실업자가 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신은 이제 고령자로 국가에서 생활을 보살펴 주지만 딸과 손자 손녀는 자신이 누리지 못한 자유를 한껏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전진: 내 자식이 자기 몫을 다하면서 올바르게 살고 잘살면 좋겠습니다. 항상 딸아이를 보면 말합니다. 과거를 절대 잊지 말아라. 북한에서 강냉이 빵을 배터지도록 먹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했던 그 말을 절대 잊지 말라고 딸에게 말합니다.
세 명의 자녀를 북한에서 잃은 전진 할아버지는 아직도 북한에 사는 형제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렇듯 음력설 명절을 앞두고는 고향생각을 떨칠 수가 없답니다.
전진: 명절에 밥이나 해먹는지 걱정스럽죠. 처음에 여기 왔을 때는 정착금 탄 것을 북에 많이 보냈습니다. 아무래도 형제가 거기 있으니까 생각이 납니다. 북한에선 명절에는 형님. 동생 하면서 만났는데 지금은 혼자 여기 있으니까 외로운 감도 있고 쓸쓸함도 있고 그렇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자 전진(가명)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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