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인민군 제대군인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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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일반인 보다는 아무래도 조직생활을 한 사람이 상하관계도 지킬 줄 알고 고난을 헤쳐 나가는 정신력이 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10년 군생활을 한 인민군 출신은 남한에 가서도 사회적응이 빠를 텐데요. 오늘은 북 강원도 출신의 탈북여성 박희순 (가명)씨의 이야기입니다.

박희순: 내 인생에 성공이라는 것은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를 이뤘을 때 성공이라고 봐요

박희순 씬 상위계급으로 제대한 군인 출신입니다. 2007년 탈북해 남한생활은 2010년부터입니다. 박 씨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대하고 한참이 지난 후였습니다.

박희순: 저는 고향을 떠난 것이 제대를 해서 오니까 부모님이 너무 어렵게 사는 거예요. 강냉이로 연명을 하고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 빨리 장사를 해서 돈 벌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밀수꾼을 통해 중국에 가서 1년만 벌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넘어간 거예요.

지나고 보니 우스운 생각이 들지만 처음 남한에 갔을 때는 거리의 수많은 자동차나 따닥따닥 붙어 있는 고층건물 그리고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의 사람들에 놀랐는데 아직 풀지 못한 문제가 있갑니다.

박희순: 가장 신기했던 것이 저는 지하철에서 돈을 알아서 계산해 표가 나오는 거였어요. 거스름돈이 정확히 나오니까 기계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줄 알았어요. 지금도 의문이 안 풀리는데 그게 제일 놀랍고 은행거래 할 때 카드를 집어넣으면 돈이 나오는 것이 새로워 보이고 놀라운 거예요. 처음 경험을 하니까

잠깐 부연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남한에 가면 사람을 상대하기보다 기계를 대상으로 뭔가를 해야 할 일이 많을 수 있습니다. 북한 장마당에서 흔히 보는 광경인 돈을 내면 사람이 거스름돈을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직사각형 모양의 사람크기만 한 기계 앞에 서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정한 후 기계에 돈을 넣으면 거스름돈과 물건이 나오는 자동판매기가 많기 때문인데요.

지하철 표를 살 때 그리고 신문이나 과자 또는 극장표를 살 때 등 그 예는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하는 일을 기계가 대신하는 것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함입니다. 회사 측에서 본다면 사람이 하는 일을 기계가 대신할 때 들어가는 비용이 적기 때문입니다.

신기한 것은 잠깐의 여흥이고 아무래도 중요한 것은 남한생활에 적응해 살아가는 것인데요. 그러자면 우선되는 것이 취업입니다. 박 씨도 직장생활에서 동료와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에 적잖게 애를 먹습니다.

박희순: 힘들었던 것이 한국 사람하고 상대하면서 조금 신경 거슬리는 소리를 하면 탈북자라고 깔보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제가 다혈질이거든요 군대에 오래있어서요. 의사소통이 잘 안되면서 힘든 면이 많았어요.

기자: 같은 조선말인데 왜 말이 안 통할까 하실 텐데요.

박희순: 한국은 말이 외래어도 많고요. 우리가 같은 한국말인데 우리말을 알아듣기 힘들어하더라고요. 우리는 얘기하는 것을 친절하게 말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내가 성나서 얘기하는 것으로 알더라고요. 나는 친절하게 말하는데 상대방은 그렇게 안 느끼는 거예요. 남한사람들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없이 보죠. 간혹 너희 왜 고향 버리고 왔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에 대한 방어로 저도 항상 한국 사람들을 대할 때는 짜증스럽게 대할 때도 있죠. 처음 2년은 대화가 잘 안돼서 힘들었어요.

제대군인답게 용감한 박 씨. 남한에 가서 컴퓨터를 먼저 배우고 바로 자동차 가죽 의자를 만드는 재봉일 부터 합니다. 일명 자동차 가죽시트 공장인데요. 3년을 거기서 일하며 좌충우돌 새로운 생활을 이어갑니다.

박희순: 처음에는 엄청 내가 무서웠데요. 남자들은 날 재수 없는 여자로 생각했단 거예요. 심지어 홍보팀에 장가를 안간 분이 있었는데 저한테 자꾸 접근을 하더라고요. 저는 틈을 안줬어요. 배가 나오고 살찐 사람인데 저는 뚱뚱한 사람을 안 좋아해요. 구내식당에서 밥 먹을 때도 내 곁에 와서 말을 걸고 해서 피하고 했는데 같이 일하는 언니에게 재수 없는 여자라고 했다는 거예요. 자기는 말을 걸고 싶은데 피한다고요. 그 얘기를 전해 듣고 너무 분해서 남들이 다 퇴근했을 때 보자고 하고 막 따졌어요.

급기야 남자 동료와 몸싸움 직전까지 가게 되는데요.

박희순: 그놈이 먼저 손을 올리는 것을 내가 잡아서 확 비트니까 몸이 뚱뚱해서인지 비틀거리면서 몸을 가누지 못 하는 거예요.

결국 그 남성은 회사에서 쫓겨나고 박 씨는 결혼 전까지 직장생활을 잘 할 수 있었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물러설 줄 모르는 박 씨는 문화의 차이로 오해가 생겨 다투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은 서로 이해하며 힘든 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박희순: 저는 제일 좋은 것이 인권의 자유가 있어서 좋고. 먹을 것이 많아 좋은 거예요.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못사는 사람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다 먹고는 살잖아요. 저는 북한에서 굶어죽는 사람을 많이 봤거든요. 우리는 풀만 먹는 것이 싫어서 여기 왔는데 여기 사람들은 풀만 먹겠다고 산골로 가니까 신기하고 여기 사람들은 무슨 좋은 일이 생기면 오라고 해서 밥 사주고 어울리면서 나눠가면서 살더라고요. 언니들이 봉사가자고 하면 다 같이 가거든요. 북한에선 누가 누굴 도와주고 해요. 자기 살기도 힘든데. 그런 것이 행복했는데 지금은 가정을 이뤘으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해요. 남편이 날 사랑해주고 하니까 좋아요

지난해 말 남쪽 남성과 결혼한 박 씨는 아직 신혼입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사랑을 나누며 자신의 꿈도 키워가고 있답니다.

박희순: 저는 군경상담학과를 다니거든요. 그러면서 안보강의를 다니거든요. 북한에서 군생활을 오래했으니까요. 저는 목표가 가정생활 잘하면서 우리는 한 민족이니까 꼭 통일을 해야 더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런 쪽으로 적은 힘이나마 이바지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저의 희망이죠. 그래서 노력하고 있는 것이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박희순(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