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주민이 탈북해 남한으로 가서 새 출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이 맘먹기에 따라 놀라운 성과를 만들기도 합니다. 오늘은 남한에 가서 바로 간호조무사가 된 탈북여성 김경옥(가명)씨의 이야기입니다.
김경옥: 난 여기서 이렇게 쌀밥을 먹는 데 반세기가 넘게 분단된 나라가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세계에 외치고 싶어요.
함경북도 출신으로 2001년 탈북한 김경옥 씨는 이제 남한 생활이 3년째입니다. 북한에서는 가족이 정치범으로 몰려 가장 힘든 시기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볼 생각으로 강을 건넜는데 운명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흘렀습니다.
김경옥: 내가 무조건 오빠들은 살릴 것이라고 친구 동생과 국경을 넘게 됐습니다. 넘는 순간에도 장사밑천을 만들어 북한으로 오겠다고 생각했죠. 말도 모르는 저와 친구는 사천성에 팔려갔습니다. 중국에서도 못사는 지역에 팔려갔는데 이틀 만에 도망쳐 나오다가 한족에게 잡혀서 죽기 직전까지 맞았습니다. 도살장 돼지 잡는 소리가 났다고 주변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과거를 떠올리자니 너무 가슴 아파요.
당시 29살이었던 김 씨는 며칠씩 굶어가며 중국 남방지역에서 연변까지 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조선족 할머니가 김 씨를 다시 한 번 한족에게 돈을 받고 넘기고 맙니다.
김경옥: 정말 북한 땅을 떠날 때 나쁜 마음이 아니었고 내 가족을 살리고자 한 것인데 어째서 중국 땅에서 가는 곳마다 나쁜 사람만 만나는 겁니다. 하늘 보면서 내가 나쁜 짓 안하고 살았으니까 그래도 하늘이 무심치 않겠지 하면서 또 기운을 내서 걸었습니다. 이틀을 걸어서 북경엘 갔는데 그곳에 고향 아이들이 6명이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9살 때 헤어졌던 아이도 있고 너무 반가운 아이들을 만났는데 그 모습을 보니까 남루한 옷을 입고 찢어진 양말을 신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0년 20년 심지어 30년 까지 나이 차이가 나는 불구 장애인 반벙어리 등과 팔려가서 성노리개로 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8년을 그렇게 중국에서 생활하다가 결국 신변안전 문제로 남한행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탈북자들이 남한에 가면 모두 거치게 되는 사회적응교육시설인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바로 취업하게 됩니다. 하나원에서 간병인 자격증과 컴퓨터 자격증 등 취업에 필요한 준비를 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김경옥: 5개월 동안 낮에는 학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병원에 가서 환자를 간호하는 간병인 일을 했습니다. 하루 두 시간 세 시간 씩 자면서 했습니다. 움직이면 돈이 되니까 맘만 먹으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다 데려올 수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진정이 안 돼는 겁니다. 하룻밤만 일해도 3만원 넘게 주는 겁니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남한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데 3년에서 5년이 걸린다고 하지만 김경옥 씨는 간호조무사로 일하면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만들어 갑니다. 특히 김 씨가 대상하는 사람들이 아픈 노인들이어서 환자들은 언제나 친절하고 싹싹하게 구는 김 씨에게 호감을 줬던 겁니다.
김경옥: 나는 당당하게 어르신 어디가 아프십니까? 행복하십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북한에 어르신 같은 분들은 이미 죽은지도 열두 번입니다. 혼자 흥분해서 어르신들을 대할 때도 많았습니다. 벌써 2년이 지났지만 그분들은 물론 같이 일하던 간병사들과도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3년 동안 일을 하면서 지냈는데 힘든 것은 없습니까?
김경옥: 아뇨. 전혀 없습니다. 지금은 여러 자격증도 따고 사회복지사도 졸업할 단계가 돼서 너무 뿌듯합니다. 내가 기초수급자도 아니고 이제는 중간층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것 없고 건강도 따라 주고 하니까 어려움은 없습니다.
지금이야 남한생활에 대해 큰 어려움이 없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8년 동안 생활했던 중국 생활로 인해 혼란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돈의 가치에 대해 감을 잡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일한만큼 수입은 생기는 데 버는 것을 어떻게 지혜롭게 써야 할지 몰라 사서 고생을 했던 겁니다.
김경옥: 쌀이 7천원 6천 원 하니까 이 돈이면 중국에서는 반년 월세 입니다. 중국 돈으로 1만 7천원이면요. 그러니 김치를 먹고 싶어도 사먹지 못하고 돈을 모으고 있는데 반년이 지나 적십자 도움이가 반찬은 있는가? 물어보면서 왜 자꾸 마르냐고 내게 물었습니다. 절대 내색을 안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 직장생활하면서 회식비로 20만원씩 내고 하니까 내가 생각을 바꿔야 하겠구나 생각했죠. 그동안 북한에 송금하고, 적금 넣고, 은퇴연금 넣고 하니까 처음에는 6천 원짜리 김치를 먹을 수도 1만 원하는 쌀을 사먹을 수도 없었던 거죠.
현재 지방도시의 보건소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김 씨는 가상공간인 인터넷을 통해 대학공부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환자들을 돌보고 밤에는 컴퓨터를 켜놓고 사회복지학을 공부합니다. 벌써 3학년으로 내년이면 대학 졸업장을 받습니다. 김 씨는 이렇게 더 나은 모습으로 스스로 변해가는 모습이 너무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 씨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탈북자들과 봉사단도 만들어 자신보다 더 힘든 이들을 돕는 일에 쓰고 있습니다.
김경옥: 작년까지는 1년 과정으로 탈북자 상담사 교육을 받았는데 올해는 1년 과정으로 동료상담원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일요일은 요양시설에 가서 미용부터 발안마, 청소 등 봉사를 갑니다. 연극은 저희가 북한 탈출부터 남한정착까지 여기 있는 교회, 여성회관 등을 다니면서 공연을 합니다. 우리 7명이 다 직업이 있는 사람들인데 모여서 탈북자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10일은 연극 연습을 하고 20일은 컴퓨터 학원에 나가면서 매일 모이다 시피 합니다.
365일 매일처럼 낮과 밤을 쪼개서 알차게 생활하는 김 씨는 자신의 수입 일부를 북한에 있는 가족을 위해 송금한다고 했습니다. 항상 이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좋으면서도 때때로 눈물이 나는 것은 가족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김경옥 씨는 말합니다.
김경옥: 한국에 와서 떳떳하게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철창 없는 감옥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우리 부모 형제를 생각하면서 훗날 통일이 되면 함께 배고팠던 시절 얘기 하면서 지금의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김경옥(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