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면 심장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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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먼저 먹이를 먹는 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지런히 살아야 차려지는 것도 많다는 표현인데요. 어둠을 뚫고 태양이 떠오를 때 즈음이면 거리에 출근하는 사람들 많이 봅니다. 하루 중 이런 아침이 제일 좋다는 탈북자 박건하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박건하: 아침에는 바쁘게 출근을 하는데 다른 사람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심장이 뛰고 제가 살아있는 느낌을 받게 되거든요.

북한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남들이 다 부러워하던 세관원으로 일하다 탈북한 박 씨는 탈북동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박건하: 중국에 갔어요. 그때 머물렀던 할머니가 교회를 다녔어요. 그 집에서 성경책을 봤는데 혼자 본 것이 아니라 같이 갔던 친구와 봤죠. 중국 갔다 와서 보위부에 잡혔는데 조사 때 난 말을 안했는데 그 친구가 고백을 했나 봐요. 그래서 나는 노동단련대에 갔다 와서 보위부가 나를 감시한다는 것을 알고 탈북을 결심했죠.

노동단련대를 다녀온 후에는 감시를 받아 생활도 어려워졌고 부수입을 올릴 방법도 없었습니다. 결국 중국을 오가다 보니 문제가 생겼고 탈북을 해서 태국을 거쳐 남한에 가게 됩니다.

박건하: 그때 가져갔던 것이 웅담입니다. 북한 동물원에서 곰을 사육해서 약재로 쓰기 위해 쓸개를 뽑아요. 중국에서 직접팔 수는 없었고 같이 갔던 친구 친척집에 맡겨놓고 대신 그에 상응하는 물건하고 돈을 좀 가져왔습니다.

기자: 남한에 간 것은 몇 년이었습니까?

박건하: 일단 탈북해서 중국에서 3년 살다가 태국에 가서 1년 정도 있다가 2005년에 남한에 입국했습니다.

중국에 살면서 남한에 대해 뉴스를 봐서 알았고 또 제 3국을 거치는 동안 자본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았기 때문에 남한 땅을 밟았을 때도 크게 놀란 것은 없지만 지금도 잊히지 않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박건하: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가는데 산에 나무가 꽉 찼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북한은 뭘 했는가? 하는 분노가 솟구치더라고요. 경제발전에 대해 느낀 거죠. 북한은 산에 땔감 마련하느라 나무 자르고 텃밭 만들어 옥수수 심고했는데 남한은 야산에도 나무가 빽빽 한 것을 보니 경제적으로 모든 것이 낫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던 거죠. 북한은 인민을 위한 나라라고 했는데 한 것이 뭐 있는가 하는 비판의식이 생기더라고요.

40대 나이에 북한출신이 남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어떤 것이 있을까? 일단은 사회를 알아야 뭔가 시작할 수 있겠다는 맘이 들어 준비를 하게 됩니다.

박건하: 처음에 와서 공부를 좀 했어요. 처음에는 기대가 많았죠. 그런데 와서 보니까 자유로운 생활을 못하다가 갑자기 자유가 차려지니까 두려운 거예요. 북한에서는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당에서 시키는 일만 하다가 와서 직업부터 시작해서 오늘 뭘 먹을까 까지 다 본인 선택이니까요.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학교 가기 전까지 건설노동자로 일했죠. 그런데 하다보니까 몸도 약하고 육체적 일도 한계가 있으니까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전기기술을 배웠죠. 1년 과정을 다니고 전기와 승강기 기능사 자격을 땄어요.

기초기술 자격증을 취득하고 취업을 눈앞에 둔 박 씨는 구직을 미루고 느닷없이 북한인권 운동에 뛰어듭니다. 중국에서 강제북송 당하는 탈북자 소식, 고향마을에서 먹 거리 걱정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외면하기 힘들었던 겁니다. 그는 먼저 남한에 간 탈북자들이 조직한 단체 중 NK지식인 연대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현재는 탈북자 인권단체 활동을 잠시 접고 물류 유통회사에 취업해 일하고 있습니다.

박건하: 과장의 직급을 받아서 거기서 기획도 하고 마케팅 일을 하고 있습니다. 판매방법에 대해 기획을 하는 거죠. 쉽게 말해 판매계획수립 업무를 담당하는 겁니다.

남한생활도 이젠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10년이 됐습니다. 뒤돌아보면 어떻게 살았는지 너무 시간이 빨리 갔다는 생각뿐인데요. 후회는 없답니다.

박건하: 제가 10년 남한생활을 돌아보니까 금전적인 부분 보다는 자아실현을 이뤘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제가 방송통신대학 4년을 졸업했습니다. 여기는 입학하기는 쉬어도 졸업이 어려운 곳입니다. 졸업 율이 30%밖에 안돼요. 여기서도 방통대 졸업했다고 하면 다시 봅니다. 열심히 산 것으로 평가한다는 거죠. 이것 졸업하고 대학원 과정 하고 이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자부합니다.

북한으로 말하면 준박사과정인 석사는 국민대학교 법무대학원에서 북한인권법에 대해 공부하고 논문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취업은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생활에 안정부터 다진다는 계획입니다.

박건하: 전기기사 자격 공부를 다시 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평생직장이 없잖아요. 평생직업은 있지만요.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구소에서 일할 수도 있겠지만 잘할 수 있는 것, 적성이 뭔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전기일이 맞더라고요. 사회활동을 하더라고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야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전기기사 자격 취득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북한출신이 남한에서 가서 제일 좋은 것이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라고 말하는데요. 박건하 씨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고 싶은 운동도 즐기고 가고 싶은 곳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박건하: 제가 운동을 좋아해요. 올해는 시험 때문에 많이 못 갔는데 겨울에는 스키 타는 것을 좋아합니다. 스키 장비를 다사가지고 겨울이면 시즌권을 사가지고 갈 정도였어요. 내가 북한에 있었으면 스키를 타봤겠는가 그런 생각도 해보고 가끔씩 운전을 하다가도 북한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박건하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