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여성 용접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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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쇠를 녹이고 잘라 붙이는 용접일. 무거운 장비를 쓰고 뜨거운 불꽃이 튀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북한출신 여성인데요. 남쪽에 가면 돈 많이 벌고 남성이 하는 일이라 꼭 해보고 싶어 용접기사가 됐다고 합니다. 오늘은 탈북여성 이가을(가명) 씨를 소개합니다.

이가을: 내가 내손으로 돈을 벌 수 있을 때 행복한 거예요.

이 씨는 중국 생활 7년에 한국생활은 9년입니다. 이 씨의 고향은 북강원도로 탄광과 시멘트로 유명한 천내입니다. 이 씨의 탈북은 어찌 보면 즉흥적이었는데요.

이가을: 1999년이었고 사실 탈북동기가 없었어요. 무산 고모네 집에 놀러 갔다가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에 강변에서 놀다가 강을 넘은 거예요. 우리 집은 강원도라 탈북이나 도강

이런 것을 몰랐고 중국으로 장사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고모네 집에 놀러 왔다가 가을이었는데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강에서 씻고 하다가 강을 건너게 된 거죠.

기자: 강가에는 경비병도 있고 경비가 삼엄하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가을: 그 당시에는 경비가 심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강에 나와서 빨래하고 했으니까요.

중국에선 텔레비전, 전화도 없는 아주 깊은 산골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몽골을 거쳐 2006년 한국에 갑니다. 그간 남쪽에서의 생활을 되돌아보면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이가을: 처음에 힘들었던 것은 혼자 있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어딘지 모르게 같은 듯하면서 다른 문화의 한국에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같은 풍습인데 뭔가 뭔지 모르게 같이 하면 할수록 모르겠는 거 있잖아요. 간단히 얘기하면 북한에서 20살까지 살았어요. 아버님이 알콜 중독자이면서 가정폭력이 심해서 난 왜 태어났을까 이 악몽이 언제 끝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어요.

그리고 중국에 가면서 이제 아버지의 폭력에서 해방이다 하면서 갔는데 완전히 말이 틀리고 문화가 틀린 데다 산골마을에 살다보니 중국에서의 7년이 북한에서 20년보다 더 힘들었어요. 그리고 한국에 올 때는 지상낙원에 간다 했죠. 27년의 고통을 이제 모두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몰랐어요. 돈 버는데 정신이 없었고 집이라는 안식처도 있었고요. 혼자라는 외로움 빼고는 돈 버느라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런데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하면서 만 8년 남한생활이 북한과 중국에서 살았던 27년 세월보다 더 힘들었던 거예요.

아니 한국에서 살았던 시간이 북한이나 중국에서보다 더 힘들었다니 무슨 소린가 하실 겁니다.

이가을: 그 27년을 합친 시간보다 훨씬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었다는 거예요. 북한에서 한 고생과 중국에서 한 것과는 또 다른 시련, 고생스러움이 있었죠.

몸이 힘든 것은 돈을 벌기 위해 쉬지 않고 일을 많이 해서이고 마음이 힘들었던 것은 사람들이 자기 맘 같지 않아 상처를 받았다는 얘기입니다. 이 씨가 남한에서 경험해 본 일은 꽤 여러 가지입니다.

이가을: 제가 용접을 배울 거라 맘먹고 진주 폴리텍 대학에 왔어요. 거기 용접을 배워주는 산업처리학과가 있었어요, 2007년 입학해서 용접을 배웠죠. 그러면서 각종 알바를 다해봤어요. 식당, 편의점, 주유소, 보험회사, 화장품 판매 등을 했어요.

기자: 여러 가지 일을 했던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 그랬나요?

이가을: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있었고 이 사회를 빨리 알기 위해 말을 배우고 지역을 알기 위해서요. 고향이 어디예요 라고 물어보면 그 지역에 대해 말을 해야 하잖아요. 식당은 내가 나중에 식당을 하고 싶어서 했고, 학교가 6시에 끝나서 그 이후에 할 수 있는 일과 주말은 쉬니까 그때 할 수 있는 일을 한 거예요. 왠지 뭐든 다 해보고 싶었어요.

많은 직업 중 여성이 힘든 용접 일을 하게 된 동기가 있었을 텐데요.

이가을: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 아들이 없었어요. 제가 맏딸인데 아들이 아닌 이유로 아버지가 학대를 했어요. 겸상을 한 적도 없고 손잡고 어디 가본적도 없었어요. 내가 남자가 아니란 것

때문에 어릴 때부터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왜 아들이 아니라고 아버지는 날 학대할까 란 생각도 많았고요. 그래서 남자가 하는 것은 다 해보고 싶었어요. 99년 두만강을 넘어와서 중국에서 동생을 잃어버렸어요. 동생을 찾으려면 돈도 벌어야 하니까 일을 닥치는 대로 했죠. 특히 용접이 돈벌이가 된다 해서 용접 배우겠다고 결심하고 하나원을 나온 거예요.

현재 경상남도에서 화력발전소 공업용 보일러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이 씨는 웬만해서는 쉬질 않는데 가끔 휴식을 할 때는 마음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깁니다.

이가을: 회사에 일이 없어서 쉬라고 하면 혼자 음악 틀어놓고 운전하는 것 좋아하고 커피숍에 가서 차 마시는 것도 좋고 바닷가에 가는 것도 좋아하고요. 차는 100만원만 줘도 사니까 부담이 없고요. 운전은 7년 했으니까 어려움 없이 타고 다녀요.

올해 2015년 이가을 씨는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이가을: 솔직히 가정을 갖고 싶어요. 아이를 좋아하니까 3명 정도 낳고 부자는 아니라도 나를 아껴주는 따뜻하고 진실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용접이 한국에서 보다는 해외에서 돈을 많이 번다고 하니까 좀 더 넓은 세상에서 일해보고 싶어요. 더 이상의 정서적인 변화 없이 안정적으로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요.

이런 소망 위해 더 큰 아니 제일 급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중국에서 헤어진 동생을 찾는 일입니다. 그동안 브로커도 중국으로 많이 보내봤는데 일이 잘 안됐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꼭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이가을: 언니가 99년 9월 14일 국경을 넘어서 그 집에서 다음날 나왔는데 언니가 가까운 곳에서 살았는데 향옥이를 언니가 많이 찾고 있고 언니 살아있으니까 제발 언니를 찾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어요.

1985년 7월 1일 생으로 이름은 향옥 입니다. 언니가 향옥 씨를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다음번에는 자유아시아 방송을 통해 동생 향옥 씨를 만났다는 소식을 꼭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용접공 이가을(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