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인가?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감사함을 느끼면서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식료품 판매원으로 일하는 40대 후반의 탈북여성 최수희(가명) 씨 이야기입니다.
최수희: 절대 한국에 온 것을 후회안하고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함경북도 온성에서 살다 탈북한 최수희 씨는 이제 남한생활 10년이 됩니다. 보통 남들은 평일에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는 쉰다고 하는데 최 씨는 주말에 일을 더 많이 합니다.
최수희: 제는 대상FNF(주) 대기업의 판매 사원으로 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여러 제품을 생산하는데 '종가집' 김치가 대표적입니다. 작년 12월 평택 롯데마트로 발령이 나서 거기서 두부와 콩나물을 팔고 있습니다.
남한에는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큰 건물 매장이 있는데 이런 곳을 마트 라고 하고 앞에 상호를 붙여 이마트, 롯데마트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겁니다. 최 씨는 롯데 마트라는 곳에서 식자재 판매원으로 일합니다.
기자: 많이 팔립니까?
최수희: 매출인 전달에는 900만 원 정도로 1천 만 원을 판매한 매장도 있습니다.
기자: 한 달이면 며칠을 근무하십니까?
최수희: 우리는 정직원이라 무조건 휴일은 쉬어야 해요 하지만 정직원이니까 매번 쉬지는 않고 매출 올리려고 노력하고 있죠.
기자: 이제 5년차가 됐는데 일은 할 만합니까?
최수희: 일은 처음에는 힘들어요. 배우는 과정이 있어서 1년 정도 지나야 몸에 익죠. 유통업이란 것이 하루 종일 서서 하는 일이라 몸도 힘들고 고객 상대하는 일이라 스트레스도 많이 받지만 열심히 사는 거죠.
기자: 한국에 온 것은 2004년인데 북한을 떠나신 것은 몇 년입니까?
최수희: 1999년에 탈북했어요. 아버지가 월북자거든요. 70년대에 남한출신을 막 추방했는데 그때 저희가 함경북도 온성으로 나왔거든요. 중학교 때까지는 평양에서 학교 다녔거든요. 최 씨는 두부와 콩나물을 팔아 전달에도 900만 원 미화로 약 8천 달러 이상 매출을 올렸다고 했습니다. 많이 팔면 그만큼 자신에게 돌아오는 격려금 즉 인센티브가 늘게 되는데요. 보통 한 봉지에 몇 달러 씩 하는 식료품을 팔아 만 달러 가깝게 매출을 올리자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지 상상이 가실 겁니다. 최 씨가 처음 남한생활을 시작한 곳은 서울이 아닌 지방입니다.
최수희: 남한입국은 2004년입니다. 그리고 7월에 사회에 나왔죠. 처음에는 강원도 속초에 집을 받았어요. 남들은 전부 서울을 선호했지만 저는 고향이 가까운 강원도에 받았는데 생활하면서 보니까 젊은 사람들 일자리가 없더라고요. 게 공장이 있는데 잡아서 다리 분리해서 쪄서 냉동시켜 일본에 수출하는데 거기서 1년 반을 일했어요. 친구가 어느 날 경기도 오산에 이 마트가 개업하니까 일자리 있다고 해서 온 것이 그 이 마트에서 수산코너에서 일을 했죠.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강원도에 살다가 서울 수도권 인근지역으로 이사를 옵니다. 아무래도 일자리를 찾아 온 셈이 됐는데요. 몇 년 그렇게 식료품 판매 일을 하다가 더 나이를 먹기 전에 공부를 해야 겠다는 생각에 컴퓨터 학원엘 갔고 회계를 공부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회계 자격증을 따서 회사 경리로도 잠시 일했는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활이 그리 만만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최수희: 한국 땅을 밟는 순간 잘 왔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잠시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북한에서 못 먹고 어렵게 살았던 것을 떠올렸어요. 북한에서 힘들게 살 때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한국 분들과 문제가 있어도 참고 이해하고 했더니 나중에는 인정해 주고 한국 사람들보다 나에게 더 관심을 갖고 친구하겠다고 다가오는 분이 많더라고요.
아침에 나가면 밤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매일 같은 일상의 반복이라 일하면서도 딱히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거나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루 종일 서서 하는 일이라 다리도 아프고 물건을 팔기 위해 계속 말을 하다 보니 목도 아프고 할 것 같은데 불만은 없습니다.
최수희: 사는 맛이 나는 거예요. 북한에선 우상화에 동원되고 자유가 없었잖아요. 여기선 먹고 쓰고 맘대로 하니까 너무 행복해요.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너무 잘 왔다는 생각을 하죠.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 북한 사람은 아직 배급도 못 받고 힘들다고 보도를 하는데 나도 북한에 있었다면 저랬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죠.
다른 탈북자들은 제주도를 몇 번씩 갔다 오고 해외여행도 다니는 것 같은데 자신은 한 번도 여행이란 것을 못 가봤다면서 올해는 꼭 시간을 내서 제주도라도 한 번 다녀오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몸이 지쳐 피곤함도 더 느끼게 되는데 건강에 힘쓰겠다고 합니다.
최수희: 제가 평택으로 발령이 나서 다니는데 버스로 시간이 한 시간 걸리는데 너무 난폭 하게 운전을 하시니까 멀미가 나는 거예요. 집에 차는 있는데 신랑이 타고 다니니까 제가 버스를 타는데 힘들어요. 그래서 계속 일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해요. 참고 하기는 하는데 힘들어요.
기자: 주 며칠 일하는 겁니까?
최수희: 휴무는 쉬게 되어있는데 명절이 끼고 하면 제가 매출 때문에 쉬질 못해요. 1월에도 설 명절이 있었는데 쉬질 못했어요. 그래도 한 달에 두 번은 쉬게 돼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은 그래도 쉬죠. 쉬는 날은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 좀 늦잠을 자다 일어나면 집 청소를 해요 그리고 음식 만들고요. 이제는 산을 다니려고 해요. 산악회를 따라 갔었는데 좋더라고요. 너무 힘들어서 아무 것도 못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가? 더 잘살 수 있을까 고민을 하면서 회사에서 하는 운동회도 참가하고 산악회 따라 산을 갔는데 좋더라고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은 산엘 가려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최수희 (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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