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며 고맙습니다

남산에서 시민들이 일출을 보며 기도를 하고 있다.
남산에서 시민들이 일출을 보며 기도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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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사람이 곤경에 처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보통 잃을 것이 없기에 최선을 다하게 되고 결국 상황을 반전 시키게 됩니다. 오늘은 매일 기도라며 감사히 산다고 말하는 탈북여성 박은혜(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박은혜: 아들이 너무 아프고 고난이 컸어요. 그래서 아들 때문에 기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교회가 있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진짜 하나님이 있는지 기도를 해보자. 그때부터 지금껏 기도를 해왔는데요.

기도를 하면서 아들은 신기하게 건강을 되찾게 됐고 그래서 아직도 기도를 계속 하고 있다는 박 씨. 그는 탈북하던 지난 1997년 까지 함흥시 성천강구역에서 평범한 노동자로 힘든 생활을 근근이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박은혜: 남편이 젊은 나이에 차사고로 사망하고 애들이 셋이었어요. 거기에 친정엄마까지 있어서 다섯 식구를 내가 책임져야하는데 어린 아이를 업고 출근하고 일하고 했지만 국가에서는 배급이 안 나오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죽게 생긴 거죠. 그래서 내가 엄마에게 말하기를 지금 가진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한 끼 먹고 우리 식구 그냥 쭉 일주일만 누워있자. 그래서 죽자. 더 이상 지탱을 못하겠는데 앞으로 죽도 못 먹는 상황이 오면 더 괴롭지 않겠는가? 죽자 엄마 이러니까 엄마가 일어나서 무릎을 치면서 애원하는 것이 나는 늙어서 죽어도 되지만 너는 어린 아이들 데리고 살날이 한창인데 왜 죽겠냐고 하냐? 이런단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럼 중국 갈까? 하니까 엄마가 그럴 수도 있냐 하더란 말입니다.

혼자 몸이었다면 모를까? 어린 아이들까지 딸린 박 씨가 중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박 씨의 가족을 보살펴줄 울타리가 필요했죠. 그래서 조선족과 재혼을 하게 되는데요.

박은혜: 저한테는 잘해주는 데 아이들을 너무 천대했고 아이들이 웃고 그러면 소리치고요. 엄마는 비 오고 눈 오고 하면 하루 쉬기도 하는데 아이들은 매일 일하고 먹을 것도 맛난 것이 있으면 아이들에게 하나 줬다가는 남편한테 난리가 납니다. 1년 반을 같이 살다가 정말 같이 살수가 없어서 나왔어요. 한족이면 또 모를까? 같은 조선족이 어떻게 그렇게 천대를 할 수 있는가 하고 나왔어요.

어찌하다 보니 중국에서 참고 숨죽여 살아온 세월이 13년. 중국에서 더는 못 살겠다고 떠나 남한에 도착한 것이 2010년입니다.

박은혜: 너무 좋았죠. 저희는 캄보디아로 왔는데 이 많은 탈북자가 한국에 가는데 처음에는 신기해 받아줬겠지만 이 많은 사람을 어찌 받아주겠는가? 그런 마음도 들고 기쁘긴 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우릴 반갑게 받아줄 것인지 아니면 북한에서 왔다고 차별을 줄 것인지 걱정하면서 왔어요. 그런데 와서 국정원에 와서 하룻밤 자고 나니 근심했던 싹 풀리고 내가 왜 이런 걱정을 했지 하면서 너무 좋은 거예요. 무섭지도 않고 궁전 같은 곳에 왔다는 그런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아들과 함께 남한생활을 시작한 박 씨는 중국에 있는 딸이 올 때까지 빨리 자릴 잡고 싶었습니다. 그러자니 그냥 집에서 놀 수만은 없었던 거죠.

박은혜: 저는 한국에 온다고 해서 환상을 가지고는 안 왔습니다. 어디 가든 일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릴 때부터 노동을 사랑했습니다. 일하는 것이 나에게 보약이다라고 생각하고 살거든요. 교회에 가서 권사님에게 일하고 싶다고 말을 했더니 저를 데리고 회사를 가더라고요. 제가 집을 받고 한 달 만에 출근을 해서 5년 동안 일했어요. 지금은 회사에 불이 나고 문을 닫았는데 그때 마침 제가 교통사고를 당해 사진을 찍으니 척추협착증이 있더라고요. 북한에서 너무 고생해 지병이 있었는데 몰랐던 거죠. 병원치료도 받고 민간요법으로 벌침도 맞고 해서 효과를 봤습니다.

박 씨가 5년동안 일했던 회사는 건설자재 회사였습니다.

박은혜: 그 회사는 스티로폼 생산회사인데 단열재 제품을 만드는 회사였어요

기자: 생산직 일이었나요?

박은혜: 지금도 비슷한 일인데 학생들 문구용품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학교 벽보 아이들 색판을 만드는 것도 있고요. 지금 들어간 지 한 달이 안돼서 이런 것도 있구나 하면서, 신기하다 하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건강을 되찾고는 다시 일을 시작한 박은혜 씨. 노동강도는 북한에 비해 더 세고 힘들지만 힘들지가 않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힘든 만큼 보상이 뒤따르기 때문이죠.

박은혜: 한국에는 내가 일한만큼 열매를 거두잖아요. 북한은 인민이 김부자 머슴이나 같아요. 저는 월급을 조선돈으로 30원 받았어요. 그 돈이면 고급음식을 먹으려면 모자라고 국수를 사서 한 끼 배불리 먹자면 될 돈으로 한 달을 쪼개 써야하거든요. 완전 사람 못살 곳이죠. 여기는 좀 차별을 받는다고 해도 살만해요. 남한사람들이 북한에서 여기 온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해요. 말이나마 칭찬을 해주고 합니다.

지금은 아들, 딸이 분가를 해서 일요일에 교회가면 만날까 평일에는 서로 바빠서 얼굴보기도 힘듭니다. 아들은 보험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딸은 대학생입니다. 모두가 자기 일에 충실한데요. 박 씨는 행복하게 살자면 꼭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박은혜: 저는 돈 부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요. 돈 부자로 살겠다는 욕심을 가지면 뭔가 성공을 못할 것 같아요. 첫째 건강, 둘째는 베풀며 사는 마음을 갖자 하죠. 아들도 한 달에 두 번씩 딸하고 봉사활동을 다니고 저는 일을 하니까 봉사활동은 못 나가고 주변 고향친구들이 아파서 일 못하고 집에만 있는 친구를 찾아서 휴식 하는 날마다 음식을 만들어 주고 합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만들고 합니다.

그리고 꼭 이루고자 하는 소망은 좋은 사장이 돼서 직원들에게 베풀며 사는 거랍니다.

박은혜: 앞으로 저는 회사 같은 것을 운영할 수 없을까 소망 해봐요. 내가 운영을 한다면 돈을 버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노동자 안정을 첫째 보장해주고 식사 때는 편히 먹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고 싶고 사람 관리도 잘할 것 같은 마음입니다. 어느 때가서 그것이 실현되겠는지 싶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박은혜(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