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주민들은 평양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지 아십니까? 평양에서도 중상류 층에 속하는 이들의 생활은 이것이 사실일까 하고 듣는 이가 자기 귀를 의심하게 될 지경입니다. 오늘은 전직 평양 무역일꾼 김명철(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10여 년 전 탈북해서 서울에 정착한 김 씨는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때도 굶어본 적이 없었고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고가 났고 탈북합니다.
김명철: 평양에서 살았고 중국을 오가면 거래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자금이 모자라서 중앙당 39호실 돈을 가지고 나갔어요. 30% 정도 자금을 돌려 나갔다가 사기를 당했습니다. 들어가질 못할 상황이 된 겁니다. 들어가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해요. 중앙당 39호실 돈이란 것이 매달 30일이면 총화가 됩니다. 돈이 안 맞으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죠. 돈을 꺼내려면 7곳의 승인을 받고 꺼내는데 거기 있는 사람들은 저보다 엄청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북한 내부에 있었지만 평양이란 중심부에서 당 고위층을 상대했기 때문에 외부 세계 소식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한 드라마도 어렵지 않게 봤습니다. 일반 사람들과 비교하면 보고, 듣고 하는 것에 제약이 별로 없었다고 봐야 할텐데요.
기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에 왔을 때 놀랐습니까? 직접 경험은 처음인데요.
김명철: 북한에 있을 때 한국 드라마를 너무 봐서 발전상을 알았기 때문에 크게 놀라진 않았어요.
기자: 직접 보고 듣고 했을 때는 상황이 다른 건데요?
김명철: 그렇죠. 나와서 많은 선배들은 북한 사람을 색다른 눈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것을 못 느꼈어요. 인복이 있어서 그런지 좋은 사람들만 만났고 바쁘게 지내다 보니 그런 것을 못 느꼈어요.
북한에서는 돈과 권력이 있던 사람인데 남한 사람들에게는 김 씨도 똑같이 한 사람의 탈북자였던 거죠. 이런 상황에 크게 만족은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남한생활이 좋았답니다. 그 이유는?
김명철: 자유요. 북한에서 지도원급으로 있다 보면 1년이면 두 번 정도는 가택수색이 나와요. 옆집에서 자꾸 신고를 하는 거죠. 저 집은 시장에 가서 고기를 하루건너 사다먹는 다. 이렇게 신고를 하면 그 사람들이 나오는 거죠. 그러면 내 월급하고 집안 살림을 보는 거죠. 군부라고 하면 월급이 2만 원정도예요. 물론 일반인은 2천원밖에는 안되지만요. 저희는 월급도 타질 않아요. 집에 텔레비전, 냉장도 있으면 그 돈을 따지는 거죠. 월급 받아서 사려면 북한에선 10년 정도 벌어야 하는 거란 말이죠. 압수해가면 그걸 또 찾아와야 하는 거예요. 그게 젤 싫었어요. 자꾸 간섭하는 거요. 돈을 많이 벌면 많이 벌어 문제고 적게 벌면 적게 벌었다고 하고요. 여기 오니까 그게 없어서 제일 좋았어요. 간섭이 없고 편안함이요.
일반 북한 사람도 잘 모르는 중산층 평양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들어볼까요?
김명철: 무역 지도원이면 북한에서는 중산층 정도라고 보죠. 중앙당 사람들 1일 공급, 2일 공급 받는 사람들 빼고는 다음 부류에 속하죠. 가족들 데리고 나가서 고려호텔에 가면 1천 달러 정도 쓰고 오거든요. 남한 돈으로 하면 백만 원 정돈데 그 정도는 쓰고 오죠.
기자: 1천 달라요?
김명철: 네, 여기서는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북한에서는 엄청 큰돈이죠.
기자: 고려호텔에 가서 1천 달러를 쓰고 들어와도 별 신경을 안 쓰는 군요?
김명철: 네, 고려호텔 입장료만 200달러정도 되고 밥 먹고 수영장 가서 수영하고 하면 1천 달러는 씁니다.
북한에서는 물론 일반 남한이나 미국에서도 하루에 1천 달러를 몇 명 되지 않는 가족 식사비용으로 쓴다는 것이 평범하게는 들리지 않는데요. 환율과 북한의 경제상황을 생각해보면 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김명철: 무역기관에 있다 보니 그렇게 벌죠.
기자: 그 돈은 월급과는 별개로 뒷돈으로 번 돈이란 말이죠?
김명철: 월급은 원채 타질 않아요. 담배 몇 갑 살 돈밖에는 안되니 그냥 문건상 그만큼 탄다는 말이고 무역기관이다 보니까 무역하면서 떼기도 하고 나가서 10만 달러에 팔아오라고 하면 한 13만 달러에 팔아 나머지 챙기고 해서 돈을 저축하고 합니다.
그러면 김 씨가 받는 월급만으로 고려호텔을 이용할 수 있었을까요?
김명철: 그렇게 까지 계산을 해보진 않았는데 북한에서는 당시 100달러에 33만원이었거든요. 내가 군부에서 높은 월급을 받는 다고해도 2만원 씩 계산을 해도
한 2년 벌은 돈을 하루 나가서 탕진하는 것과 비슷하죠.
북한에서 달러의 위력은 굉장한 것이고 또 그것을 버는 과정에는 정상적 상거래 보다는 서로 뒤를 봐주는 뒷거래가 상당히 견고함을 알 수 있습니다.
김명철: 북한에서는 회사라고 안 해요. 다 공장, 기업소라고 하죠. 회사라고 하면 달러를 벌어올 수 있는 곳을 말하는 겁니다. 일단 회사 소속돼서 지도원급이라고 하면 국가에서 지표를 받아요. 너는 금, 은, 동을 팔아라. 그러면 국내에서 마음대로 중국하고 거래할 수 있는 승인을 받는 겁니다. 그리고 너는 버섯, 산나물 이런 것을 일본하고 거래해라 이런 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승인을 받는 거예요. 그러면 윗기관에 많이 갖다 줘야해요. 이런 것을 북한에서는 “모자쓴다”고 하죠. 뭔가 당에다 선물을 바치면 이 사람은 일정한 기간 아무리 잘못해도 무기를 팔던 마약을 팔던 보호를 해줍니다.
무역회사 지도원으로 평양에 살던 김 씨의 집은 현재 남한에서 사는 집과 비교하면 그 규모만 들어도 입이 딱 벌어질 정도입니다.
김명철: 처음에 와서 정말 못살겠더라고요. 북한에서 150평에 살다가 여기 오니까 16평인지 14평인지 그런 집인데 진짜 집 같지가 않더라고요. 그래도 그 집에서 한 6개월을 살았어요. 하나원에서 나올 때도 빨리 벌어 큰집가라고 했거든요. 우리 나올 때도 임대주택 못 받아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어요. 나중에 전세로 나갔는데 그 이후로는 다 30평 이상에서 갈았죠. 지금도 30평 이상이고요.
기자: 평양에서 150평이란 것이 단독주택 말하는 거죠?
김명철: 아파트요. 한 층을 통째로 털어 살았어요. 방이 몇 개인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이렇게 큰 평수의 아파트는 북한에서 그가 누린 권력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를 말해줍니다. 항상 김 씨의 주변에는 그를 찾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김명철: 여기 한국에 와보니까 문화가 남의 집에는 잘 안가더라고요. 그런데 북한에선 친구들이 항상 와서 우리식구끼리 밥 먹는 경우는 외식 나가는 것을 빼고는 별로 없었어요. 항상 친구, 친척, 형제들이 항상 와서 응접실도 있고 손님 자는 방도 딸로 있고 그런 식으로 꾸며 놨었죠.
일반 북한 사람들이 평양 중상류 층 사람들의 생활을 모르듯 김 씨도 평양을 벗어난 지역 사람들 생활이 어떤지 모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탈북해 남한행을 하면서 입국 과정에서 북한의 현실을 알게 됩니다. 김 씨는 차마 이들 앞에서 자신이 평양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명철: 올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서 왔어요. 그 사람들하고 섞여 오는게 힘들더라고요. 다 못 먹고 못살았는데 나는 잘 먹고 살다 오니까 평양에서 살다 온다고 못하겠더라고요. 거짓말을 하면서 왔는데 나라고 지방 실정을 다 알았던 것은 아니에요. 무역기관에 있다 보니 다닐 때도 승용차 타고 기본 사람 살만한 곳으로 다니고 하니까 사람 못사는 그런 깊숙한 곳까지 가보고 하진 못했거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무역일꾼 김명철(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평양 상류층의 생활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