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계획하고 준비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저 나무 밑에 누워 단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배짱이가 될 수는 없는 건데요. 오늘은 매순간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 열심히 살아야 후회가 없다고 말하는 50대 초반의 탈북여성 김영숙(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영숙: 잠 다 자고 어떻게 돈을 벌어요. 나는 식당일 할 때 1년에 두 번밖에 안 놀았어요. 일하기 싫고 공짜를 바라고 하니까 정착을 못하지...
남한생활 9년차가 되는 김 씨는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면서 하는 만큼 가져가는 사회가 남한이라고 말합니다. 김 씨가 고향을 떠난 것은 10년이 훨씬 더됐는데요,
김영숙: 저는 북한에서 2003년 떠났습니다. 당시 김책에서 살다가 시집을 남포로 갔는데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남포 관문에서 조개를 잡았어요. 살기 너무 바쁘니까 중국배가 오면 밀가루와 조개를 바꿔 먹었어요. 죽을 고비도 세 번이나 넘겼어요. 썰물에 떠밀려서요.
중국 친척에게 방조받기 위해 조중 국경마을까지 갔다가 외삼촌의 권유로 중국에 머물게 됐고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남한으로 갑니다. 그런 과정에서 김 씨는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김영숙: 완전 다른 세상이죠. 북한에선 쌀밥이 귀했는데 중국에서는 돼지뜨물에도 입쌀이 뜬 것으로 보고 깜짝 놀랐어요. 중국에서 한 2년 살다가 한국에 가니까 또 천지차이가 나는 거예요. 몽골을 통해 갔는데 공항에 도착하니 너무 환하고 깨끗하고 모든 것이 빤짝빤짝 한 것이 이런 나라가 있나 정말 남조선이 맞나? 거지가 많다고 하던데 왜 이렇게 변했지 하고 놀랐어요.
남한정부의 지원과 민간단체의 도움이 있지만 그렇다고 탈북자가 남한에 가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곳은 아닙니다.
김영숙: 처음에는 브로커한테 돈을 줘야 하는데 하나원에서 정착금 받은 것을 주고 나니 너무 살기 힘들었어요. 열흘 만에 아파트 단지 앞에 벼룩신문이 있어서 구인광고를 보고 전화를 했어요. 집에서 한 40분 버스를 타고 가는 데 식당일이었어요. 월급이 150만원인데 고깃집이더라고요.
중국에서 했던 것보다 육체적으로는 더 고된 식당일을 하루 12시간 씩 하며 지내게 되는데요.
김영숙: 중국여자 둘 한국여자 둘이 있었는데 난 북한사람이 아니고 조선족이라고 하고 들어갔어요. 한 달 동안 코피를 흘렸어요. 돈 벌기 힘들구나 하는 것도 느꼈고요
기자: 그렇게 힘들었습니까?
김영숙: 중국에서도 식당일을 했지만 여기 식당일이 더 힘들어요. 중국에는 밤 9시면 문을 닫고 점심시간만 바쁘고 한데 여기는 밤에 손님이 더 많잖아요. 다음날이면 손을 꾸부릴 수가 없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말은 중국여자들도 조선말을 하니까 소통은 괜찮았어요. 한 8개월 일하다가 집근처 삼계탕 집으로 옮겼어요. 처음에는 알바로 일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월급을 더 줄 테니 일하라고 해서 일하다가 하루는 무거운 것을 드는데 딱 하니 소리가 나면서 다리가 말을 안 듣더라고요. 다음날 병원에 가보니 디스크 3,4번이 나와서 다리에 마비가 왔다는 거예요.
통장에 돈이 한푼 두푼 모이는 재미에 힘든 것도 잊고 살던 김 씨가 갑자기 쓰러진 겁니다. 몸이 맘처럼 움직여주질 안습니다. 다행히 탈북자는 병원이용이 거의 무료라 바로 치료를 받습니다.
김영숙: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했어요.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물도 안 사먹고 버는 돈을 전부 저축했어요. 보름 만에 복대를 차고 퇴원을 했는데 그때 우울증이 왔어요. 외출을 3개월 동안 안했습니다. 사람 소리만 들어도 무섭고 집에 혼자 가만히 있으니까 눈물만 나고 서럽더라고요.
몸이 아프니 북한의 가족 생각이 더 났던 겁니다.
기자: 누가 옆에서 서럽게 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는 거군요?
김영숙: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아무도 없지 밖에 나가서 채소도 못 사오지 하니까 엄마 아빠 생각이 나고 그랬던 거예요. 전 그게 우울증인 것을 몰랐어요.
남한생활에서의 두 번째 도전이 시작됩니다. 이번엔 접시를 나르고 씻는 식당일이 아니고 학원에서 컴퓨터 앞에서입니다.
김영숙: 30명인데 몽땅 한국 사람이고 둘만 북한사람인거예요.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말했더니 선생님을 붙여주더라고요. 북한 사람은 집중력이 뛰어나잖아요. 집에 가서 연습하고 하니까 한 달 반 만에 한국사람 자격증 하나 딸 때 저희는 3개를 땄어요. 그것을 6개월 다니다 나오니 이번엔 이북5도청에 다른 교육이 있다는 거예요. 가보니까 일주일에 두 번하는 액세서리 수업이 있더라고요. 거기는 강사 자격증을 주는 반도 있고요 그래서 나도 이제 몸이 아파서 힘든 일은 못하니까 자격증을 따서 강사를 한 번 해보자.
현재 사무직 일을 하는 김영숙 씨는 낮에는 일하고 시간이 날 때 인터넷을 통해 공부하는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하기 위해 나아가 통일이 된 후 북한에서 꿈을 펼쳐보고 싶은 욕심에서입니다.
김영숙: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가 한민족이니까 받아준 것은 고맙고 한데 우린 남한에 내려와서 나무 한그루 안 심었는데 집도 주고 정착금 주고 학원도 무료로 보내주잖아요. 여기도 노숙자도 많고 한데 정부에서 우리에게 집을 줬잖아요. 그래서 난 적십자에 가서 성금도 내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나는 바란다는 것이 크게는 못해도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보답하는 것이 아닌가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김영숙(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