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제사가 된 당 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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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으로 간 북한 출신 중에는 북에서 의사였던 사람이 남쪽에 가서 다시 공부해 의사면허를 취득해 환자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탈북자들은 새로운 기술을 익혀 북에서 하던 일이 아니고 전혀 다른 직종의 일을 합니다. 오늘은 북한에서는 당 일군이었는데 남한으로 가서 봉제사가 된 박명수 (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함경남도 출신으로 당 일군이었던 박명수 씨. 50세가 된 해 고향을 떠났습니다.

박명수: 제가 98년에 중국에 갔습니다. 당시 북한의 상태는 고난의 행군이 최악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도저히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그런 상태에서 탈북 했습니다.

남한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북한 주민들도 실제로 남한생활이 그럴까 하고 대부분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남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박 씨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말하면 믿지를 않습니다. 서로의 사정을 너무 몰라서 벌어진 일인데요.

박명수: 당시 제일 힘들었던 것이 기아입니다. 솔직히 98년 당시엔 하루 한 끼를 먹기도 힘들었어요. 껍질을 벗기지 않은 옥수수가루 한 숟가락을 넣고 바다에 나가 다시마 뜯어 온 것을 넣어서 물 부어 끓여 끼니를 때웠어요. 여기 사람들은 돼지도 먹지 않는 것을 어떻게 먹는가하겠지만 그랬어요.

기자: 98년 중국 가서 바로 한국으로 왔습니까?

박명수: 아녜요. 2002년에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오기 전까지 3년 정도 떠돌아 다녔습니다. 바로 넘어오질 못했어요. 베트남을 통해 캄보디아로 갔다가 마지막 태국을 거쳐 오는 기간이 한 1년 걸렸습니다. 2004년 8월에 한국에 왔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가족들은 먹을 것을 찾아 뿔뿔이 헤어져야 했고 그 가족을 찾아 중국으로 갔던 것이 남한 행이 됩니다. 사실 박명수 씨는 북한에서 중상층에 속한 생활을 한 편이었는데도 상황은 힘들었습니다.

박명수: 북한에서 33년 동안 국가 공무원으로 있다 보니 넘어오지 않아도 될 형편이었는데 중국으로 간 것은 가족을 찾으러 갔다가 거기서 남한 사정을 알고는 내가 찾아야 될 것은 한국이다 하고 오게 된 겁니다.

기자: 다실 돌아갈 수도 없는 것이고 이젠 살아야지 하고 일을 했을 텐데 10년 동안 어떤 일들을 해보셨나요?

박명수: 제가 여러 가지 잡일을 포함해 회사만 해도 10여 곳을 넘게 다녔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인간은 이렇게 사는 것도 있구나 하는 힘든 일도 있었고 한데 실제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이것이 자유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기서 내가 사는 방식은 오직 나의 생각과 나의 육체가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현재 와서는 남부럽지 않게 사니까 긍지도 갖는 겁니다.

기자: 뭐가 제일 힘드셨습니까?

박명수: 제도의 차이라고 할까? 생활의 차이라고 할까? 북한에선 폐쇄된 사회에서 오직 김정일 사상만 알다가 여기서 사회 모든 것을 보니까 그 차이가 심했고 정착하면서 남한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 하는 걱정에 정신적으로 많이 위축이 됐어요. 사람들 속에서 휩쓸리기 힘들고 소극적이 됐어요.

남한생활 처음 1년은 지금과 달리 정착금도 많이 나왔고 모든 생활이 자유롭고 하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풍년이요 아쉬움 없이 지냈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 서서히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정부 보호기간 5년이 지나면 일반 국민과 같이 되는데 그 안에 경제적 자립을 하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박명수: 혼란스러웠는데 내 몸을 움직이지 않고 개척하지 않으면 북한에서의 집단생활과 달리 개인생활에서는 굶어죽는다는 것을 알고 눈으로 보니까 따라가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북한생활도 했고 중국에서도 살았고 하니까 적응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빠르지 않나 싶어요. 변화된 생활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 빨랐던 것 같아요.

기자: 현재의 생활에 만족할 때는 언제입니까?

박명수: 자본주의가 좋다. 사회주의가 좋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좋은 것이 인간으로 태어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 행동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하겠는데 사회주의나 공산정권에선 말을 못하고 하는데 여기선 내가 벌어 생활하고 자유롭게 모든 생활을 하니까 저에겐 이것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당과 수령이 없으면 개인의 행복은 없는 줄 믿었고 탈북하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나라가 북한처럼 사는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박명수 씨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박명수: 완전히 변했습니다. 좁은 우물 안에 있다가 넓은 바다에 사람을 풀어놓으니 자유롭고 근심 걱정이 없고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는 것을 체험으로 아는 거죠. 북한과 비교하면 지금 생활이 중앙당 부장이나 과장 생활쯤 일 텐데 이런 생활은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제가 인생의 절반을 살았는데 이때까지 누려보지 못한 생활을 지금이라도 마음껏 해 보겠다 하니까 아침에 일어나 우유배달하고 회사 나가고 저녁에는 개인 부업할 일감 가져오는데 북한에서는 힘들어서 어떻게 하는가 하겠지만 그러나 오직 내가 많이 벌고 해야 인생의 남은 시간을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니까 힘든 줄 모르고 부지런히 일해야겠구나. 그 속에서 웃음도 찾고 행복도 찾고 하는 것 같습니다

기자: 지금 하는 일은 뭡니까?

박명수: 집사람이 봉제일을 한 30년 했어요. 지금 둘이 나가서 봉제 일을 하다 보니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저녁 6시면 손자를 학원에서 데려오고 하는데 집에 와서는 회사에서 다하지 못한 것을 가져와서 개인 부업을 하고 다음 날 출근하고 그럽니다.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고요.

기자: 만드는 것은 뭡니까?

박명수: 미국하고 영국, 프랑스로 수출하는 스카프 만드는 일을 합니다.

기자: 봉제일은 할 만 하십니까?

박명수: 저는 내가 하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을 하니까 더 바랄 것이 없어요. 모든

자유를 누리고 있으니까 좋아요. 그것이 한국에 나온 것이 잘했구나 하는 거죠.

제2의 고향 오늘은 박명수 (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