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사람은 보통 큰 시련을 한 번 겪고 나면 한층 성숙해집니다. 더 깊이 생각하게 되고 멀리 보는 눈을 갖게 되는데요. 북한에서의 힘든 기억들을 가지고 남한생활을 시작한 탈북민들은 그런 측면에서 보면 모두가 성숙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은 북한전문 기자가 되겠다는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여대생 박성애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박성애: 할머니가 가면서 먹으라고 사탕이랑 과자를 사서 보자기에 넣어 주셨는데 …
탈북 당시 16살이었던 박 씨는 이렇게 어머니와 남동생 세 식구가 두만강을 건너던 날의 기억만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박성애: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할머니가 조급하게 오시다가 전봇대에 부딪치셔서 이마에 피가 났어요. 그전까지는 멀리 가는 구나 하는 생각을 못했는데 할머니를 보고 슬펐고 눈물이 났어요. 이젠 할머니를 못보는 구나 하는 생각에요. 두만강 건너고 할 때는 정신 없이 두만강을 넘었어요.
사랑하는 할머니와 고향 땅에서 오래도록 살 수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박 씨 가족을 그냥 놔 두질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2008년 정든 곳을 뒤로 하고 할머니와 작별을 하게 됩니다.
박성애: 무엇보다 큰 이유는 저희 집안은 도강자의 집이 된거예요. 보위부나 안전부에서 항상 감시를 했고 보위지도원이 아빠의 출처를 물으면서 저희를 괴롭힌거죠. 어머니는 그 사람이 술먹고도 찾아와서 괴롭히고 하니까 피해있었는데 그러니까 저에게 와서 엄마 어디 있는지 말하지 않으면 너희 교장선생님이게 가서 아빠가 도강했다고 말해서 네가 챙피해서 학교를 못다니하겠다고 겁주고 그랬거든요.
탈북해서 이미 남한에 보금자리를 꾸민 아버지의 주선으로 박 씨 가족은 중국에 머물지 않고 바로 아버지가 사는 한국으로 갑니다. 사회주의 세상에 살다가 하루 아침에 자본주의 세계로 들어간 건데요.
기자: 한국에 도착했을 때 16살 나이에 보이는 세상은?
박성애: 그때 눈에 보이는 세상은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나는 이 사람들이랑 너무 다르다는 것을 느꼈어요. 저만의 틀에 갇혀있었던 것 같아요.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살 때 이거 얼맙니까? 이렇게 함북도 사투리를 쓰면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물어보는 그런 상대방의 호기심이 저는 불편했어요. 그게 싫어서 집에서 6개월을 안 나갔었죠.
북한에서도 남한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봐서 놀라움은 별로 없었는데 어딜가나 주변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나이여서 그랬나봅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서 변화를 경험합니다.
박성애: 세상으로 나온 것은 대안학교에 가서 검정고시를 보기로 하고 갔어요. 일반학교와 달리 선생님들도 탈북민의 심리적 아픔같은 것도 다 알고 하니까 기숙사 학교였는데 학교 가서 점차 또래들과 어울리면서 사소하게는 쇼핑도 하고 맛집에서 음식도 사먹고 이사회 사람들과 부딪치니까 자연스럽게 동화가 되더라고요.
혼자만의 세상에서 나와 학교생활을 1년정도 하니까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게 됐고
이제 자신이 어떤 일의 주변을 맴도는 이방인이 아니라 당당하게 생활하는 주인공이 되어가는 거죠.
박성애: 놀이동산가서 놀고 영화보고 학교 근처 지하쇼핑몰에 가고요. 친구들과 가끔 거기 가서 옷도 입어보고 사고 했어요. 친구들과 가서 놀고 근처에서 분식도 사먹고 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더라고요. 저도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모습을 저도 하고 있더라고요. 탈북자라는 자격지심은 4년 정도 되니까 전부 사라졌고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현재는 한국외국어 대학교 4학년 재학생입니다. 북한이 고향이란 사실이 다를 뿐 자기 또래의 남한 청년들과 겉으로 보기엔 특별히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속내용은 자세히 들어다 보면 분명 차이가 있답니다.
박성애: 남쪽의 대학은 자유분장한 것같아요. 한국에서 대학에 가고 보니까 친구들이 너무 자유롭고 일단 큰 차이는 내가 뭘 공부할지 선택을 하고 직업에 대해 1학년때부터 생각을 하더라고요. 뭘 하면서 살지 고민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북한에서는 학교 졸업하면 배치를 받아서 그런 걱정을 안 했는데 친구들을 보면서 나도 꿈을 꾸게 되더라고요. 나는 언론정보학을 전공하니까 한국에서 기자가 돼서 남북한 가교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사실 대부분의 탈북민이 남한에 가면 걱정하는 부분이 과연 북한출신인 자신을 친구로 받아줄까? 따돌리지는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극적으로 행동하게 되고 작은 일에도 마음에 상처를 받고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데요. 어느 순간이 되면 이런 걱정은 부질없는 일이 된답니다.
박성애: 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무래도 북한에서 살다 오면 모든 것이 생소한데 여기 학생들과 받는 교육이 달라서 같은 공부를 해서 이해하는 속도가 느리다고 해야하나요? 여기 학생들은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손들고 교수님에게 질문을 하는데 저는 그것을 못하겠는 거예요. 손들고 질문하면 사람들이 제는 북한에서 와서 저래 이렇게 말할 것 같아서 못했었죠. 친구들에게도 공부하다가도 물어볼 수 있는데 자격지심 탓인지 힘들었는데 3학년이 되니까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는 것도 용기다. 내가 굳이 탈북자여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모를 수 있다는 것을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편하고 자연스러워졌어요.
무엇이 행복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참 대답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자신있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남한에 가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긍정의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박성애: 제가 한번은 꿈을 꿨어요. 저에게 변절자라고 하면서 친구들 버리고 가서 좋더냐 묻더라고요. 제가 한 말이 난 대학도 가고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어요. 꿈에서 깨서 생각한 것이 북한에서는 대학을 못 갔을 텐데 한국에 와서 이런 것도 하는 구나 하는 감사의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두번째는 대학에 와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아서 미국 여행을 갔어요. 여권을 받아 출국장을 나가는 데 묘한 찡한 느낌을 받았어요. 북한에서는 하늘에 비행기 날아가면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비행기를 보고 그랬거든요. 제가 비행기를 타고 혼자 미국 여행을 가고 있어더라고. 그때 내가 자유로운 한국이 아니었으면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최근에는 인터넷 북한전문 방송인 배나TV에서 북한관련 기사나 시사문제를 놓고 진행을 맡고 있는 박성애 씨.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것이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박성애: 앞으로 계획은 지금 4학년이니까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고 뭔가 삶에 의미가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 일이 북한전문 기자로 일하고 싶은 것이고 통일이라는 것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여대생 박성애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