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서는 개인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보통 50세 중반 이후가 되면 현재 다니는 일을 그만 두는 은퇴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해서 저축한 돈으로 여생을 어떻게 하면 알차고 값지게 지낼 수 있을까? 다른 인생을 설계 하는 건데요. 환갑을 넘기고 남한으로 간 탈북자들의 사정은 남한 사람과 좀 다를 것 같습니다. 오늘은 63살에 남한에 입국한 함수성(가명) 씨의 이야기입니다.
남한 생활이 13년째가 되는 함수성 씨는 올해 76세입니다. 북한에서는 교원이었는데 90년대 중반 이후 처음 외부 세상을 알게 됐습니다.
함수성: 라디오가 생겼습니다. 93년인가 중국에 있는 친척방문을 다녀오면서 가져왔습니다.
보통 사람은 출판물, 라디오 이런 것은 세관에서 검사를 해서 못 가져옵니다. 주파수를
돌리니까 방송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놀라고 상당히 겁이 나더라고요.
지금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는 않겠지만 당시 외부 세계의 라디오를 듣다가 발각되면 정치범 수용소에 갈 정도로 지금보다 더 통제가 엄격했던 시절입니다. 함 씨는 모두가 잠이 든 밤이 되면 새로운 사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함수성: 세상에서 우리나라는 만 풍년의 나라고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 나라라고 계속 그랬는데 우리나라 밖에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면서 한국에 대해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밤에
이불을 머리에 둘러쓰고 가만 가만 들었습니다.
그때까지도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말들을 전부 믿을 수는 없었지만 은퇴를 해서 먹고 살길이 막막하던 2000년 결심을 합니다. 그리곤 아내와 딸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함수성: 그때는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거리에 나가도 북한에는 우측통행인데 여기는
좌측통행이고 이상했습니다. 언어도 저는 평양에 오래 살았는데 서울 말씨를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간판도 머릴 깎으러 가자해도 이발소란 말은 없고 술을 한잔 하려고 해도 키친 집으로 그런 것이 어려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자고 했을 때가 벌써 환갑을 훌쩍
넘기고 남들은 손자 손녀 재롱을 보면서 노후를 즐길 때. 다행이 활동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만큼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함 씨는 새롭게 태어난 기분으로
남한 사회를 알자고 취업합니다.
함수성: 낯선 땅에 와서 적응하자면 한국 사람과 같이 생활해봐야 알겠다고 해서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열심히 일해서 45일 만에 부장 승진이 돼서 부하직원을 5명 정도 두고 1년 반 정도 일했습니다. 영업직이었는데 매장이 있어서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방문을 통해서 물품을 판매 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인맥이 없어서 오래 하진 못했는데 일하면서 여기 사람들이 북한사람과 체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국 문화를 빠르게 알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하루 세끼 잘 먹고 어두워지면 잠 잘 자고 하면 뭣이 있겠는가? 특히 같은 언어를 쓰는 남한에서 다르다면 뭐가 그리 북한 사람과 다른지에 대해 함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함수성: 북한은 집단주의 사회라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이런 구호가 있는데 여기는 전부 개인주의입니다. 단편적 예를 들자면 제가 아파트에 사는 데 옆집과
교류가 없습니다. 한집은 그래도 남자와 인사를 하는데 부인하고 아이들은 절대 인사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른쪽 이웃은 몇 년씩 살아서 내가 북에서 왔다는 것도 알 텐데 전혀
소통이 없습니다.
함수성 씨는 아파트 경비일도 했습니다. 임대아파트에 물건을 팔러 오는 외부인을 통제
하고 개인에게 배달된 수화물을 임시 보관하는 일 그리고 단지 내로 들어오는 차와 나가는 차를 관리하는 겁니다. 경비일은 주간에 하면 그나마 괜찮은데 야간 조에 속하게 되면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근무를 서야 하기 때문에 몸이 더 힘듭니다.
함수성: 제가 몇 년 경비를 서봤습니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경비를 섰는데 방문 온 사람이 단지 내 좁은 도로에 자꾸 차를 세웁니다. 관리소에서는 주차 단속을 하라고 하고 장시간 도로에 차를 세우면 단속 하겠다는 경고문을 붙이라고 합니다. 그 종이를 차 유리에 붙이는데 무슨 풀인지 한 번 붙이면 잘 떨어지질 않습니다. 한 번은 불법으로 도로에 차를 세워서 내가 가 경고문을 붙였더니 여자가 당장 떼라면서 임대아파트 경비 서는 주제에 뭐 그리 으르렁 거리냐고 그때 정말 불쾌하고 모욕을 당했습니다.
일흔 살이 넘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정부에서 주는 노인연금으로 생활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살진 못하지만 북한에 살던 것에 비하면 아쉬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함수성: 제일 맘에 드는 것은 자유입니다. 사람답게 살자면 자유가 있어야죠. 북한에서는
부친이 돌아가셔도 통행증을 내야 합니다. 부친이 저희 사는 데서 700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통행증을 내자면 3-4일이 걸립니다. 사망해 가도 3일장이 지나니 그냥 묘에나 가서 한 번 인사하고 돌아오고요. 어딜 가자해도 통행의 자유가 없지 말도 못하지. 북한에서는 코 아래 구멍을 주의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 조심하라는 말이죠. 듣는 자유도 없습니다.
이제 팔순이 내일 모래인데 함 씨는 아침에 일어나면 집에 있을 못합니다. 오라고 청하는 데는 없어도 갈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60년을 북한에서 그리고 10여년을 남한에서 서로 다른 세상을 경험한 함수성 할아버지가 말하는 행복한 삶이란 이런 것입니다.
함수성: 노인회관이 있어서 컴퓨터, 서예, 영어, 일본어 배우는 것이 있고 동사무소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배우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행복이란 것은 돈이 많고 좋은 집에 살고 하는 것에서 차려진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한 몸 발 쭉 펴고 마음이 편하고 자유를 구속받지 않고 누구에게든 탄압과
통제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보장된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행복한 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교원 출신 탈북자 함수성(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