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가 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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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간 탈북자들은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출신성분이나 토대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원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기 때문인데요. 오늘은 변호사가 되기 위해 로스쿨을 다니는 탈북자 강룡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강룡: 북한에서 사범대를 다녔고 여기서 교사를 했었던 거죠.

북강원도 출신의 강룡 씨는 평양에서 대학을 다니다 탈북했습니다.

강룡: 북한을 떠난 것은 2006년이고요. 그때 상황은 고난의 행군 뒤였지만 상황이 더 좋아진 것은 아니었어요. 식량난도 심했고요. 저도 북한에서 며칠을 굶어 봤고 부모님도 굶어 돌아가시고 여동생도 돈이 없어서 거의 치료도 못해주고 굶어 죽었지만 관도 못해주고 땅에 묻고 왔습니다.

기자: 2006년이면 고난의 행군이 끝나고 10년이 지났잖습니까?

강룡: 고난의 행군이 끝났어요. 식량난은 그대로죠. 지금도 굶는 사람이 있는데요. 말이 끝난 것이지 끝난 것이 아니죠.

강 씨의 여동생은 어려운 살림에 한 입이라도 덜어보자고 군에 입대를 했는데 군 훈련 중에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떴습니다. 이렇게 동생과 부모님을 잃은 강 씨는 도강을 했고 중국생활을 거쳐 남한으로 갑니다.

강룡: 남한에 왔을 때 크게 충격은 없었어요. 중국에서 좀 있었고 제가 있었던 회사가 남한 사람이 하는 회사여서 거기서 사장님이랑 손님과 얘기하면서 나름 한국에 대해 많이 알았고요. 그래서 별로 충격은 없었습니다.

기자: 직접 와서 경험한 한국은 어땠습니까?

강룡: 다른 탈북자는 모르겠지만 저는 대성공사 합동신문센터와 하나원을 거쳐 점차 남한을 알면서 나와서 큰 충격은 없었는데 충격이라고 하면 문화적 다른 점이라고 할까 그런 것은 있었습니다.

기자: 강룡 씨가 접한 문화적 충격은 어떤 것인가요?

강룡: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예를 든다면 제가 젊은 30대의 나이에 초반에 왔으니까 청춘이 흔히 경험하는 남녀 간의 연애도 북한과는 다른 것에 놀랐죠. 여기는 연애를 하는 대상과 결혼 대상이 다르다는 말로 시작해서 북한과는 다른 점이 많더라고요.

기자: 그것에 대해 좋게 느껴졌습니까 아니면 거부반응이 일어나던가요?

강룡: 거부감 같은 것은 없었고 그때는 제가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니까 여기는 그런가? 하는 생각을 했죠. 이성교제 문제만이 아니고 친구사이에서도 한국에 와서 처음 알게 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저를 형이라고 했고 저도 동생처럼 생각했는데 저는 집에 초대를 하고 음식도 먹고 하는데 그 친구는 저를 자기 집으로 초대를 안 하는 거예요. 우리 집에 와서 자기도 했는데요. 말로는 형이라고 하지만 이 친구는 자기 집에 대한 얘기도 안 하고 초대도 안하고 해서 남한 사람들은 이렇게 다른가 하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여기 사람들은 바쁘고 하니까 집에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만나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그런 식으로 하더라고요. 집에 초대하는 것은 남한 문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 되어 버린 거죠.

남한에 가서 잠시 탈북청소년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지만 대학으로 다시 갑니다. 그리고 새로운 목표를 정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강룡: 북한에서 사범대학을 졸업 못하고 왔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졸업을 하고 정식 교사 자격증을 따자고 교사를 그만 두고 연대 교육학과로 편입해서 졸업해 교사 자격증을 받고 다시 연대 대학원을 다니다가 지금은 로스쿨로 와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기자: 결국 법조인을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강룡: 로스쿨을 간 이상 법조인이 되겠는데 현재는 변호사가 되려고 합니다. 탈북민들 속에서 변호사 업무를 하는 부분이 많이 필요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재작년에 들어왔습니다. 등록금 때문에 1년 휴학하고 2학년입니다. 이제 좀 재미도 붙고 이해가 됩니다.

강룡씨가 말하는 로스쿨이란 3년제 법학전문대학원을 말합니다.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은 누구나 지원할 수 있고 로스쿨을 졸업한 후에는 변호사 자격시험을 치르고 합격한 이들 중에 일부는 시험 성적에 따라 법원과 법무부에 판검사로 임용 됩니다.

남한생활 8년이 되는 강 씨. 남쪽에서 가정도 꾸렸고 변호사가 된다는 목표를 정해놓고 집과 학교로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으로 향하는데요. 그가 말하는 남한 세상은 이런 겁니다.

강룡: 남한에서 생활은 한마디로 노력한 만큼 결과가 생기는 살아볼만한 사회 다 라는 생각과 함께 한쪽으로는 아직 한국 사회가 민주화가 이뤄진 사회라고는 하지만 완성된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고 그 과정에 있다고 봅니다. 탈북자, 다문화가정, 장애인,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나 관용이 좀 더 필요한 사회다 라는 저 나름의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기 중에는 손전화 사용도 거의 안할 정도로 공부에만 전념하고 있다는 강 씨는 방학이 되면 북한출신 젊은이들이 활동하는 단체를 이끌고 있습니다.

강룡: 제가 활동하는 단체는 ‘뉴코리아 네트워크’ 단체입니다. 그 뜻은 남과 북이 통일 된 새로운 코리아란 의미입니다. 새로운 코리아를 만들기 위해서 북에서 온 청년 대학생, 대학원생들이 이 사회에 정착해서 당당한 구성원이 되는 것과 동시에 남한 사람들과 통일의 경험을 해보는 단체입니다. 저희가 2008년에 이 단체를 만들어서 여러 우여곡절 끝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탈북자 친목과 함께 탈북자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남한 청년들과 학술, 자원봉사, 체육활동 등 미리 통일을 경험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자 강룡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이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