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많은 수의 탈북자는 남한에 가서 좋은 것이 뭐냐고 물어보면 북한에서 배우지 못한 공부를 원 없이 할 수 있고 대학생으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40대 초반의 이은숙 (가명)씨는 여기에 하나 더 해서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일 수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오늘은 세 아이의 엄마 이은숙 씨의 얘기를 전해드립니다.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이은숙 씨는 28살에 북한을 나왔습니다.
이은숙: 제가 떠날 때는 2001년인데 그때 임신을 했어요. 북한에서 살 수 없는 상황이라 장사할 밑천을 얻으려고 중국에 있는 친척을 찾아 갔어요. 그런데 중국에 오니까 친척이 도와주질 않는 거예요. 그리고는 두만강 넘은 도강 비용을 물지 못해 팔려가는 신세가 됐고 낙태를 하려고 병원에 가자해도 신분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중국에서 아이를 낳고 살게 됐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니 한없이 눈물만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울기를 여러 날 하니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집에서도 이러다가는 생사람 잡겠다며 집으로 돌려보내 줄테니 울지 말라고 달래기까지 합니다. 막상 그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뜩 들었습니다. 대책 없이 다시 고향에 가봐야 살길이 막막했기 때문이죠. 이 씨는 이왕 중국 땅에 온 것 돈이라도 벌어서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맘을 돌려 먹습니다. 그 때가 임신 3개월이었는데요. 그리고 6년의 세월이 흐른 후 남한으로 간 것이 2007년.
이은숙: 저는 중국에서 한국 올 때 소개 받은 것은 한국이 좋고 나쁘고 가 아니고 중국에서 붙잡히면 북송 되니까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북한에서는 한국이 무섭고 공포의 대상으로 살 수 없는 곳이라고 알았는데 와보니까 정반대였어요. 아파트가 줄지어 서있고 차가 많아 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북한에서는 식량마련을 위해 시장으로 달려가고 풀을 뜯어야 했고 불을 떼기 위해 나무를 주워야 했고 했는데 남한에서는 내가 열심히만 하면 부자도 되고 대학생도 되고 이것이 너무 황홀하다기 보다 진짜 잘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았죠.
기자: 이런 세상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 지 두려움은 없었나요?
이은숙: 처음에 많았습니다. 우선 외래어를 많이 쓰니까 조선어를 쓰는데도 못 알아듣는 겁니다. 아이 용품을 사러 마트에 가는데 살 수가 없는 거예요. 다른 아이 엄마 갈 때 따라가서 부끄러우니까 물어도 못보고 그냥 따라 샀어요. 나도 좀 배워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데 3년이 걸렸어요. 한국 사람들이 북한 사람이라고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겁도 먹고 해서 집에만 있었어요. 발전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겠는가? 머리가 복잡했어요.
젖먹이 아이를 두고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집에서 컴퓨터로 공부를 하는 사이버 대학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컴퓨터에 익숙하지 못했던 이 씨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을 바꿔먹는데요.
이은숙: 주간으로 바꿔서 교수님에게 가서 물어도 볼 수 있고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한국 사회를 배워야 겠다 그래서 주간으로 바꿨어요. 애를 키우다 보니까 애가 집에 와서 물어보는 것에 답을 못하는 거예요. 엄마로서 너무 창피했어요. 그래서 대답이라도 할 수 있는 엄마가 되자 했죠. 지금은 셋을 키우는데 배워야겠더라고요.
큰아이는 5살 때 중국에서 데려갔고 나머지 둘은 한국에서 출산을 했습니다.
이은숙: 저는 이유식이란 말을 한국에 와서 알았어요. 우리는 아이를 낳으면 바로 옥수수 밥을 먹입니다. 한국에서는 6개월부터 이유식을 먹이는데 쌀죽, 채소죽, 소고기죽을 먹인다는 것을 여기서 알았어요. 브로콜리 죽을 먹이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긴 것인 줄을 몰랐어요. 북한에서는 가지, 오이, 시금치, 배추, 무밖에는 모르고 당근도 잘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마늘, 대파 이 정도만 알았는데 모르는 채소도 많더라고요. 보건소에서 알려주는 것을 열심히 들어서 아이 영양죽을 만들려고 하는데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아이를 낳고 후회를 안 한 것이 내가 북한에서 아이를 못 먹인 한을 여기서 다 풀었습니다.
남한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북한 아이보다 먹는 음식도 다양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은숙: 가루분유는 몰랐어요. 귀저기도 팬티 귀저기 금방 낳았을 때 신생아용도 있고 한데 처음에는 큰 것을 사서 실수도 많았어요. 분유는 나중에 물어보니까 너무 친절하게 가르쳐 주더라고요. 아이 간식도 북한에서는 엿이나 옥수수 뻥튀기인데 여기선 아이 과자도 나이에 맞게 먹고 유기농도 있고 하니까 너무 좋아요. 한을 풀고 있어요. 한국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너무 행복한 겁니다.
기자: 한국에서 아이를 낳았을 때가 몇 살이었나요
이은숙: 막내를 낳은 것이 36살 이었어요.
이제 큰 아이가 13살, 둘째 아들이 7살, 막내가 3살입니다. 남한에 가서 처음 3년은 힘들었지만 이젠 아이를 키우면서 대학공부도 하고 직장생활도 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하루를 쪼개 쓰기가 바쁩니다. 자신도 시행착오를 경험했기 때문에 자기보다 뒤에 남한생활을 시작하는 탈북자에겐 이런 말도 들려줍니다.
이은숙: 남한에 오면 모두가 두려워하고 돈을 벌자고 하는데 누구나 열심히 하면 잘 살수 있다고 믿습니다. 일단 한국에 오면 배워서 적응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모르는 상태에서 식당일도 해봤고 여러 일을 해봤는데 어린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우선 배워서 사회생활을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40대 초반인 이은숙 씨는 돈이 많아 부자가 아니라 무럭무럭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행복한 마음만은 누구 못지않게 부자인 사람입니다. 이 씨에게는 소박한 꿈이 있는데요. 이 꿈이 꼭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은숙: 북한에서 할 수 없었던 일을 한국에서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는데요. 내가 펼치지 못한 꿈을 자식들이 펼 수 있게 해주고 싶어요. 엄마가 지금은 돈을 많이 벌지 못하지만 아이가 배우고 싶은 데까지 능력껏 보장해주고 싶어요. 앞으로 아이들은 한국어, 중국어, 영어 이렇게 3개 언어는 했으면 좋겠어요. 박사는 아니어도 대학을 졸업해서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북한에서 와서 한국에서 이렇게 살 수 있다 이런 것을 보여 주는 멋진 사람으로 자식들을 키우겠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세 아이를 키우는 탈북여성 이은숙 (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