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꽃피는 봄이 와서 기분도 화사합니다. 그런데 북한에선 3월부터 먹을 것 걱정이 점차 더해지기 때문에 가정에 근심도 느는 때입니다. 오늘은 남한생활 10년 차가 되는 탈북여성 이명화(가명) 씨의 이야기입니다.
함경남도 홍원군 출신으로 올해 칠순을 넘긴 이명화 씨는 2003년 탈북해 다음해 남한에 입국합니다.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지금도 북한에서의 3월은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닙니다.
이명화: 제가 있을 때만 해도 풀뿌리를 캐먹고 쌀이 혹시 있으면 한줌 넣고 그렇지 않으면 옥수수 가루를 풀어 넣어 죽을 쒀 먹었습니다. 그게 2003년 전 일입니다. 제가 공장을 30년 동안 다녀서 북한 군당에서 봐줘서 식료공장 일을 하면서 밭을 줘서 농사를 짓게 해줬습니다.
기자: 하루 세끼를 다 먹을 수 있었습니까?
이명화: 네, 저는 그랬습니다. 일하고 들어와서 어두워질 때까지 손을 놀렸습니다. 분조장 하면서 옥수수도 심고 콩, 팥 심어서 열심히 일과 농사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첫해는 공장에서 옥수수를 달마다 좀 줘서 살고 3년째는 옥수수 농사를 1톤 생산했습니다. 그때 한 300평 넘는 농사를 지었거든요. 옥수수를 팔아서 비료를 사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기자: 당시 주위 분들의 식량 사정은 어땠습니까?
이명화: 당시 혼자 사는 여자들도 길가에 굶어서 쓰러져 있고 그랬습니다.
기자: 지금은 그때와 비교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이명화: 지금은 부러운 것 하나 없습니다. 정부에서 쌀을 줘서 햅쌀을 먹는데 하루 600g 이면 두식구와 손녀가 먹습니다. 잘 안 먹습니다. 우리 내외가 밥상에 마주 앉아 하는 말이 “우리는 북한에서 더 고생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이밥에 찹쌀을 넣어 잡곡이 좋다고 하니까 잡곡을 섞어 먹는데 그것도 싫다고 고구마 넣고, 콩 넣고 해도 하루 600g 내외로 먹습니다.
기자: 그 양이 적은 겁니까? 북한에선 어땠는데요?
이명화: 북한에서 보다 적습니다. 북한에선 하루 700g 받았습니다.
북한에서 하루 700g을 배급 받았는데 남한에 가서 먹는 양은 그보다 100g 정도가 적다고 하는데요. 이건 단순 입쌀을 먹는 양이 그쯤 된다는 말이고 실제 섭취하는 칼로리 양은 비교가 안 됩니다. 다시 일상에서의 먹는 문제 직접 들어보죠.
이명화: 남한에선 기름도 흔하고 고기도 돼지고기, 소고기, 해산물도 있고...이런 것을 다 반찬으로 식탁에 올려놓으면 다 못 먹어요. 그러니 밥을 잘 안 먹죠.
기자: 아침, 점심, 저녁을 똑같이 해서 드십니까?
이명화: 우린 저녁에는 많이 안 먹습니다. 아침, 점심은 먹는 데 저녁은 살찐다고 조금 먹습니다.
기자: 반찬은 몇 가지 해 드세요?
이명화: 반찬은 아무리 작게 해도 다섯 가지는 됩니다. 예를 들면 멸치, 김치도 2가지 정도 되고 돼지고기, 계란도 있고 또 마늘 그 다음 상점에 나가면 고기 압축해 놓은 것도 있는데 그것을 구워서도 먹고 오이, 양파, 감자도 몸에 좋다고 하니까 먹고 애호박도 먹고 합니다. 그러니까 반찬이 많아서 밥을 많이 안 먹죠.
기자: 북한에선 몰랐는데 남쪽에서 먹으니까 맛있더라 하는 것은 뭐가 있을까요?
이명화: 남쪽에 오니까 돼지고기도 맛있고 멸치도 맛있게 먹습니다. 또 북한에선 계란 하나 먹자면 산에 올라갈 때 아이들 하나씩 삶아 주는 데 여기선 계란을 냉장고에 가득 넣고 생활하고 오이나 애호박도 계절 상관없이 먹으니까 좋습니다. 여기엔 비닐하우스로 해서 야채도 맘대로 먹는데 북한에선 제철 음식만 먹고 겨울에는 순 김치만 먹습니다.
남한에 갔을 때의 나이가 환갑이고 이제 칠순인데요. 보통 남한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도 이 나이가 되면 퇴직을 해서 여가를 보낼 때입니다. 북한에서는 식료품 공장에서 20년을 일해 연령보장을 받았다는 이 씨 남한에서는 정부 노령연금을 받으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명화: 북한에선 70살이 되도 시골에 사는 사람은 나뭇가지라도 주워 끼니에 보탬이 되려고 하는데 여기선 먹고 사는 걱정이 없어 여행 다니고 하니까 남한 70대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모를 겁니다. 할머니들이 상가에 모여 놀기도 하고 얘기도 하고 운동도 하고 그럽니다.
기자: 돈이 있어야 차도 타고 그럴 것 아닙니까?
이명화: 돈은 국가에서 한 달 생계비가 나오는 데 그것을 조절해도 차 기름도 넣고 그럽니다. 65세부터는 지하철 요금을 안내고 탈 수 있습니다.
이명화 씨 남편은 같은 고향 출신의 탈북자인데 얼마 전 자동차를 구입해 직접 운전 합니다. 정부에서 나오는 돈을 조절해 차 기름을 넣는 다는 말은 자동차 연료비가 든다는 말입니다.
나이 70이 넘어서도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직접 자기 차를 몰고 다니는 것. 또 가정에서 쓰는 전자제품을 버릴 때도 돈을 받고 고철로 파는 것이 아니고 돈을 내야 한다는 점은 북한 청취자들이 아마 모를 거라며 꼭 들려주고 싶다고 합니다.
이명화: 북한에 있을 때는 남한 사회는 진짜 못사는 줄 알았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대부분 사람이 내일은 뭐 먹고 사는가 항상 근심에 쌓여 있는데 남한에 와서는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안하고 삽니다. 중국에 있을 때 남한에서는 냉장고 버릴 때도 돈을 내야 한다고 하기에 무슨 말인가 했는데 진짜더라고요. 아파트 쓰레기 분리수거장이 있는데 경비원에게 돈을 주면 구청에서 나와 돈을 받고 가져갑니다. 이불장 같은 것은 한 개당 1만 3천 원 정도를 줘야 가져갑니다. 저희는 여생을 사는 날까지 보고 싶은 것 돌아 다니면서 다 보고 내 생활이 괜찮으면 자원봉사도 하고 싶고 못사는 사람들 도와주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생활 10년이 되는 탈북여성 이명화(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