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사랑해요 내 딸

김영희 씨와 딸.
김영희 씨와 딸. (사진-김영희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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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사람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보면 부모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고 합니다. 오늘 소개할 여성도 딸을 낳기 전에는 자신을 버린 부모 원망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요. 이제는 그런 부모가 그립다고 합니다. 남한생활 7년 차인 탈북여성 김영희 씨의 이야기입니다.

김영희: 그때는 고난의 행군에 들어가서 너무 힘든 상황이었죠. 압록강을 건널 때도 굶어서 강물에 쓸려 내려가 죽은 사람도 많고요.

김영희 씨는 북강원도 고산이 고향입니다. 10대 후반의 나이에 먹고 살기 위해 도강을 하는데요.

김영희: 처음에는 누가 중국에 가면 쌀이며 먹을 것이 많다고 해서 탈북이란 것도 내가 무슨 위험한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넘었죠. 한국에 가려는 것이 아니고 북한에서 중국에 가면 먹고 살 수 있다고 하니까 간 거죠.

당시에는 먹고 살기 위해 야밤에 강을 건너는 사람이 많았고 중국에서 잡혀 다시 북송당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김영희: 중국에서 북한에 4번 북송당해 927(집결소)까지 갔다가 도망쳐서 또 탈북하게 됐고 한 달 있다가 또 잡히고 그런 식으로 4번을 잡혀서 한국에는 2008년에 갔어요.

중국에서 먹고 사는 것은 해결이 됐지만 언제 또 북송당할 지 모르는 신변안전에 대한 불안은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길을 떠납니다.

김영희: 2008년에는 한국에 올 때 중국에서 10년 가까이 생활해서 자본주의에 대해 조금은 알았고 한국에 와서 숨어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고자 왔고 처음 왔을 때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우연히 친구가 브로커를 소개해줘서 왔는데 한국에서 1년 동안 안 믿겨지더라고요.

기자: 어떤 것이 믿겨지지 않았습니까?

김영희: 저의 경우는 북한에서 간부 자식도 아니고 평민의 자식이잖아요. 그런데 정착금도 주고 집고 주고 살 수 있게 해주니까 내가 평민인데 한국에서 이렇게 해줄까 이런 생각을 했고 설마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죠.

남한에 도착했을 때는 그의 나이 29세. 보통 이 나이의 탈북자들은 대부분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하고 취업을 하는데 김 씨는 다른 선택을 합니다. 외로웠기 때문에 혼자라는 것이 너무 싫어서 가정을 만듭니다. 결혼을 해서 딸도 낳고 처음에는 자신이 원하는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야 했지만 달콤함은 잠시였고 남한 생활이 3년쯤 되자 걱정이 하나둘 늘어갑니다. 제일 첫째가 아이 교육 문제인데요. 과연 내가 딸을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부모로서의 당연한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김영희: 고민이 처음에는 많았죠. 내가 북한에서 배운 것과 한국에서 배우는 것이 너무 틀리잖아요. 부모는 북한 사람이지만 아이는 진짜 떳떳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고 잘되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에 지금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고 도움을 받아요. 부모 마음은 다 같잖아요. 애를 잘 키워야하고 잘돼야 하고요. 내가 일한다고 신경 못 쓰고 하면 그게 너무 안쓰러워서 애만 보면 눈물이 나고 해요.

딸을 위해서 젊은 때 한 푼이라도 저축하자 그리고 더 나이 먹기 전에 취업해서 남한사회에 대해 알자는 생각이 들었고 가만히 집에만 있을 수 없어 찾은 것이 식당일.

김영희: 24시간 감자탕 집에서 일했어요. 애가 있으니까 항상 저녁에 일했어요. 저녁 6시부터 새벽 6시까지요. 아무래도 한국 사람이 아닌 교포들과 일하고 하니까 처음에는 자기들이 오래 일해서 텃세를 부리는 것도 있었고 밤낮이 바뀌니까 힘들었죠.

노동의 강도는 중국에서 했던 것보다 힘들었고 특히 일하는 시간이 남들 다 자는 새벽이라 밤낮이 바뀌니 건강도 점차 안 좋아지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뭣보다 혼자 두고 나온 딸이 자다 깨서 엄마를 찾지는 않을 지 일하면서도 맘이 편췰 안았습니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고 그런 걱정이 짙어가는 차에 아는 친구가 동업을 제안합니다. 물론 자본은 그 친구가 대고 김 씨는 가게 일을 맡아 운영을 하는 건데요.

김영희: 네 생각했던 것보다는 나아요. 식당에 가서 일하면 시간도 정해졌고 쉬질 못하는데 이 일은 자영업이다 보니까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문 닫고 나갈 수도 있고요. 돈 보다도 내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이 장점인 것 같아요.

기자: 살면서 한국에서 제일 좋았던 순간은 어떤 것이었나요?

김영희: 내가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제일 행복해요. 지금도 그때가 가끔씩 떠오르고 힘들어도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고요. 아이를 엄마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지만 보여줄 수 없어서 행복 반 슬픔 반이었던 것 같아요.

김 씨가 딸을 보면서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은 남다른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영희: 나는 엄마 아빠가 찾아도 만나보고 싶지 않다는 미움이 컸어요. 왜 가족인데 힘들어도 책임져야 하는데 버리나 하고 원망을 했는데 나도 애를 낳고 일하니까 가끔 애를 다른 사람에게 봐달라고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마음이 찢어지는 거예요. 우리 엄마도 우리를 버리고 갈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해를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엄마 아빠를 찾아보고 싶고 동생이라도 찾을 수만 있다면 찾고 싶은데 그게 안돼서...

이 세상에 유일한 핏줄인 딸을 위해 뒷바라지를 해줄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됐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라고 말하는 김 씨 이제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딸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이랍니다.

김영희: 어릴 때는 못 느꼈는데 애가 생기고 어떻게 키워야할지 걱정만 했는데 지금은 아이가 커서 자기표현도 하고 말고 하니까 때로는 내가 힘들 때는 아가야 엄마가 힘들다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요 그러면 위안이 되더라고요. 아이를 보면서 더 힘내서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옆에 내가 책임져야할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아이를 보면서 더 좋은 길로 가자고 떳떳한 엄마가 되려면 공부도 하고 잘하자 하고 느낄 때가 많죠.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김영희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이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