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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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간 많은 수의 탈북자는 자신의 탈북동기 중 하나가 북한에서 본 남한 드라마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먹고 사는 데 큰 걱정 없고 풍족한 생활이 동경의 대상이 됐던 건데요. 오늘 소개하는 탈북여성 한청미(가명) 씨는 교화소 생활 중에 남한 행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남한생활이 1년밖에 안 되는 한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함경북도가 고향으로 40대 초반인 한청미 씨는 1998년 탈북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가서 10년을 살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중국공안에 체포돼 강제북송 당합니다. 그 후 다시 찾은 고향에서는 교화소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여기서 또 한 번 운명이 바뀌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한청미: 중국에서 생활할 때는 한국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그저 드라마로 보고..그런데 북한에서도 영화를 보면 현실과 좀 다르잖아요. 과장도 많고 하니까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면 좀 과장해서 드라마로 내보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국이 잘 산다는 것은 별로 느끼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교화소에 가서 많은 것을 알게 됐어요. 한국 가려다 잡혀온 사람들에게 말을 많이 들었어요. 거기선 자기만 열심히 하면 잘살 수 있다더라 정말 좋은 데란다. 내가 중국에서 10년 살다가도 잡혀 나갔으니까 이제 다시 나가도 북한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성공해 돈 보따리를 들고 금위환향 한 것이 아니라 머리도 들 수 없는 죄인의 처지가 돼서 10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땅. 그곳엔 한 씨의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한데요. 중국을 경험한 한 씨 눈에 비춰진 고향은 어찌 생각하면 자신의 처지보다도 한심했습니다.

한청미: 10년 전이나 북한 땅은 정말 변한 것이 없더라고요. 전 그래도 10년 지나서 잡혀 나가는 몸이지만 그래도 자기 고향이니까 얼마나 변했나 보자 했는데 10년 전과 비교해 변한 것이 없더라고요. 변한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변했더라고요. 그 전보다 사기꾼이 많아지고 다른 것은 정말 변한 것이 없더라고요.

3년 교화소 생활을 하고 출소한 한 씨는 중국이 아닌 남한을 목적지로 삼았고 지난해 뜻을 이룹니다. 중국에 10년 살 때도 생각지 않았던 남한생활. 그가 듣고 알게 된 것은 교화소에서 들은 것이 전부입니다. 물론 현실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남한에선 배급이 아니라 자신이 일해서 자신의 몫을 챙기고 만들어가는 경쟁이 있는데 그런 것이 생소했던 것이죠. 그래서 남한 생활을 좀 더 알기 위해서 더 늦기 전에 학교에 가서 배워야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한청미: 집은 충북 청주에 받았습니다. 거기는 탈북자가 공부하게끔 잘 되지 않았더라고요. 돈을 내고 배워야 하는데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울 올라와서 고시원에서 생활하면서 공부하는 겁니다. 집은 비워놓고.

기자: 생활비는 어떻게 해결하세요?

한청미: 생활비는 정부에서 나오고 그것으로 일단 청주 집세를 내고 아르바이트도 해요

기자: 알바는 뭘 하세요?

한청미: 식당일이요. 주방에서 그릇 닦는 일하고 그릇도 나르고 뭐든 해요. 할 수는 있어요.

식당일이라는 것이 주방에서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 그리고 손님에게 음식을 날라주는 접대원, 음식 값을 받는 계산원이면 되지 북한하고 뭐 특별히 다를 것이 있겠는가 하고 청취자 여러분은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한청미: 달라도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장비도 많고 음식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 있고 식당 들어가니 골 아픈 것도 많더라고요. 그릇 씻는 일은 사람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릇 씻는 일만 거의 했어요.

기자: 몇 개월이나 식당일을 해보셨어요?

한청미: 12월 방학하기 까지는 오전에 직업훈련 받고 야간에는 대학공부를 했어요. 지금도 야간에는 대학공부를 하고 있고요. 한 3개월 했습니다.

기자: 몇 시간씩 일하세요?

한청미: 오후 5시부터 교육이 있으니까 그전에 6시간 정도 일합니다.

기자: 벌이는 괜찮습니까?

한청미: 남은 것은 없어요. 학교에 일이 있으면 또 쉬고 하니까요. 회사 출근하듯 매일 가는 것이 아니고 또 해고도 당하고 하니까 말이 3개월이지 진짜 일한 것은 2개월 정도 되는데 저금은 못해도 살수는 있더라고요.

오전 시간에는 식당일을 하고 오후 시간에는 학교에 가서 대학공부를 하면서 직업훈련을 받습니다.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것이고 학비는 정부에서 주는 탈북자 지원 장학금을 쓰니 학비로 나가는 돈은 없는 겁니다.

공부는 호텔 조리 학으로 앞으로 호텔에서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가 되겠다고 목표를 세우고 수업을 받고 있는데요. 북한에서도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던 한 씨는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용어들 때문에 공부하는 데 좀 어려움을 겪는다고 털어놓습니다.

한청미: 네, 쉽지 않아요. 말을 잘 못 알아듣겠고요. 제가 북한에서 듣던 용어보다 우리가 들어보면 못 알아듣는 것이 많아요. 외래어가 그렇고요. 하나하나 공부해 가는 중이예요. 우리가 조선말이나 할 줄 알고 쓸 줄 안다 뿐이지 학술적인 말은 못해봐서 힘들어요. 친구들이 물어보면 조선말 하면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남들보다 한 두 시간 덜자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된다는 말인데요. 자기 인생 남이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힘들어도 난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생활하는 데 간혹 힘이 쭉 빠지는 때도 있습니다.

한청미: 아직 까지 자신 있다는 말은 못하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내가 할 수 있을까? 근심 절반 자신감 절반입니다.

기자: 어떤 때 그런 복잡한 마음이 생기나요?

한청미: 공부하러 가서 강의 듣고 내용을 이해할 때는 졸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들 때는 맥이 빠집니다. 사실 북한에 어머니가 있거든요. 만약 전화가 오면 돈을 보내줘야 하는데 어떡하지 다 때려치우고 돈을 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지금처럼 대학공부하면서 아르바이트 해서는 돈을 모을 수가 없거든요.

한청미 씨는 북한에서 교화소를 갔다 온 것이 정말 잘된 일이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당시는 힘들었지만 그곳에서 한국에 대해 들었고 앞으로 뭘 하면서 살아야 할 지 방향도 섰기 때문입니다. 몸은 비록 힘들지만 꿈을 있고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생겨 즐기는 마음으로 산다고 말했습니다.

한청미: 친구들이 그래요. 고생을 사서 한다고요. 청주에서 일자리 잡아 공부하면 되는데 무슨 고생을 사서하냐? 그럼 친구들한테 지금 순간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먼 훗날을 바라보고 하는 거니까 너희는 신경 꺼 하고 말합니다. 포기만 안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제 생각에는 공부를 하고 학사학위를 가지면 사무직에서 일할 수 있잖아요. 제가 탈북자가 와서 알려주자 해도 내가 많이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많이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공부를 하는데 내 생각이 옳은지 모르겠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한청미(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