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나의 인생

서울 월계동 인덕대학 축구장에서 열린 '탈북민, 외교관 축구대회'에서 탈북자 통일미래연대 축구단(노란 유니폼)과 외교관 축구팀이 경기를 펼치고 있다.
서울 월계동 인덕대학 축구장에서 열린 '탈북민, 외교관 축구대회'에서 탈북자 통일미래연대 축구단(노란 유니폼)과 외교관 축구팀이 경기를 펼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0:00 / 0:00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으로 간 탈북자들에게는 정말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안타까운 사연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너무 갖은 것이 없어서 또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가족을 지켜봐야만 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남한생활이 6년차 되는 탈북여성 김태희 씨의 이야기입니다.

김태희: 떠난 것은 1997년도에 북한에서 300만 아사자가 발생했을 때 부모형제가 다 사망하고 살길 찾아서 떠난 거죠.

함경북도 회령 출신의 탈북여성 김태희 씨는 20대 초반에 북한에서 부모형제를 다 잃고

그가 말하는 것처럼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도강을 했습니다. 그가 남한에 간지 1년쯤 됐을 무렵 ‘수난에 찼던 내 운명의 역사’란 글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요. 당시 컴퓨터 가상공간에 떠돌던 글의 한 대목을 김효선 씨의 음성으로 들어봅니다.

김효선: 아버지는 병으로 3차에 걸친 수술을 받으면서 가정은 파산 났고 언니 오빠가 한시에

머리가 돌아버렸다. 비록 돌아버린 이유가 정신병이라고 간단하게 말하면 되겠지만 유전으로 볼 때 정신병자 하나 없는 집안에 두 사람의 정신병자가 나온 것을 무엇으로 해석하면 될까?

잊고 살던 지난날에 내가 지금 이글을 쓰는 손가락이 떨린다. 정말 중국생활 십여 년에 한국

생활 비록 일 년이지만 아직 한 번도 가족에게도 내 비치지 못한 가슴 아픈 사연 때문에

또다시 내 눈에 눈물이 흐른다.

김태희 씨의 중국 생활도 순탄하지는 못했습니다.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한시도 마음을

놓고 살수 없었고 3번이나 강제북송을 당합니다. 그리고 재 탈북에 성공해서는 남한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중국 현지에 있는 한국 회사에서 취직해 마침내 남한으로 가게 됩니다.

김태희: 남한에 올 땐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자유만 있으면 좋겠다. 신분안전만 보장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오니 많은 혜택을 받으면서 내가 꿈꿔왔던 것들이 한순간에 다 이뤄진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장 그리운 것이 가정이었는데 그런 것을 이제 이뤘다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도 많이 흘리고요.

상상으로만 그려오던 남한에 도착했을 때 김 씨의 마음은 어땠을까?

김태희: 제가 중국에서 10년 살면서 남한을 텔레비전을 통해 봤기 때문에 크게 놀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북한과 남한을 비교해보면 제가 16년 전 북한에 있을 때는 교육과 텔레비전으로 봤을 때 남한에는 체류탄 가스만 가득하고 경찰이 시민을 막고 그 모습만 상상하면서 사람이 살기 막막한 곳이다 했는데 와 보니까 따뜻한 정이 흐르고....

기자: 정부지원도 있지만 살면서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을 듯한데요.

김태희: 북한에서는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의지만 가지고 왔고 신분만 보장되면 부자가 되리라는 꿈을 안고 왔습니다.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어의 장벽, 기술의 차이, 문화의 차이 등이 있어서 꿈과 포부가 무너지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희 말투 때문에 나가서 사람들이 중국에서 왔어요? 연변에서 왔어요? 하고 물으면 탈북자라고 말해야 할까? 이런 고민도 했고요. 처음에는 주유소에 나가서 일하면서 주위의 눈총을 받을 때 힘들었습니다.

기자: 어떤 일들을 해보셨는데요?

김태희: 주유소일도 하고 거기서 사장님이 인정을 해줘서 경리일도 했지만 적성에 안

맞아서 장사를 하려고 의류점에서 사원으로도 일했습니다.

기자: 남한 생활이 6년인데요. 탈북 해 남쪽에 와서 인생이 달라졌다는 느낌은 어느 순간에 느낍니까?

김태희: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지만 특별히 우리 신분에 대해 불안했는데 그런 걱정이 없어졌다는 것이 감사하고 대학공부하면서 원하는 것을 직접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북한에선 아버지가 아파서 병원 입원을 해서 수발을 하면서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살았습니다. 제가 가장이었는데 분배량이 끊겨서 딸린 식구들이 전부 굶어야 했는데 여기선 사회복지가 잘돼서 어려운 사람들을 최소한 보호를 해준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이

없어서 병원도 못가고 죽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김태희 씬 남한에서 결혼해 가정도 꾸렸고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지난해에는 대학에 진학해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김태희: 지금은 북한에서부터 하고 싶었던 꿈을 이루려고 대학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데 이왕이면 저희가 한국에 와서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을 남에게 돌려주면서 제 적성에도 맞는 공부를 택했습니다.

기자: 하루 일과는 어떻습니까?

김태희: 지금은 대학공부 하면서 북한과 제 3국에 있는 탈북자들을 위한 일과 남한 내

탈북자 정착 문제에 관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탈북자 강제북송반대, 부산시민연대에서 활동하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경남시민연대 대표이기도 하고요. 저희는 탈북자와 북한

주민의 인권에 대해 세계에 호소하기 위해 단체 활동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살기 위해 일해야 했고 봄이면 산에 가서 부채마, 삽주, 더덕 도토리를 닥치는 대로 캐고 주어도 하루에 한 끼밖에 차려질 수 없는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건강하게 살려고 등산을 가고 나이를 먹으며 늘어가는 체중을 줄이기 위해 몸깍기를 합니다. 그리고 가장 달라진 것이 꿈과 희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산다는 점입니다.

김태희: 포부는 큽니다. 나중에 통일이 되면 북한으로 가서 그들에게 필요한 사회복지 분야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그전 까지는 저를 비롯해 남한입국 탈북자들의 정착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힘쓸 겁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생활 6년이 되는 탈북여성 김태희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