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고향] “통일 노래 불러요” 탈북가수 김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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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무극 요덕스토리에 출연하기 위해 분장 중인 김충성 씨. 사진-김충성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입국 탈북자 2만 명 시대가 되면서 탈북자들이 남쪽에서 하는 일의 분야도 참 다양해 졌습니다. 이번에 국회의원도 한 명 나왔고 인텔리 계층으로 구분되는 의사, 교수, 언론기자 등 전문분야 종사자 수도 늘고 있습니다. 이중에는 많지는 않지만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도 있는데요. 오늘은 탈북가수 김충성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충성: 북한에서는 김일성한테 충성 했다면 이제 하나님 앞에 충성 하라고 충성이라고 지었어요.

올해 36세 탈북가수 김충성 씨는 이렇게 남한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미 남한에선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상을 고발하는 가무극인 요덕스토리 그리고 노래를 재미나게 엮어 만든 와이키키브라더스에서 활약을 했고 또 탈북자들이 만든 ‘선택’ 이란 제목의 영화에선 배경 음악을 작곡한 가수로 알려졌습니다. 김 씨는 북한에서도 노래를 부르던 가수였습니다.

김충성: 한국에선 가수라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성악배우라고 합니다. 성악배우로 활동하다가 철도성에도 좀 있었고 군대 예술단 그리고 지금은 청년협주단으로 다시 승격됐는지 모르겠는데 거기서 배우로도 활동했습니다. 제가 평양에 거주하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6.25전쟁 때 대한민국 국군을 도왔다는 문건이 제 뒤에 꼬리로 붙어서 평양에 살 수 없었고 제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김 씨가 단순히 평양에서 살 수 없었기에 탈북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탈북을 할 수밖에 없었던 2001년 당시 상황은 목숨이 걸린 긴박함 그 자체입니다.

김충성: 북한의 경제가 너무 어려워 굶어 죽는 사람이 많다 보니까 공장기업소의 설비를 다 뜯어 팔고 변압기, 용접기 심지어 선반 조임 장치까지 뜯어서 팔정도로 금속을 팔고 하니까 김정일이 금속을 다루는 사람은 다 죽이라는 그런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금속을 팔아먹다가 현장에서 체포가 돼서 총살되기 하루 전날 13시간 쇠창살을 뜯고 나와 압록강을 건너 탈북했습니다.

북한에서는 탈북으로 인해 자신의 이름 앞에 민족의 반역자란 꼬리표가 붙었겠지만 결코 나라를 배신한 적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가슴 아픈 것은 남쪽 사람들이 무심코 던지는 이 한마디에 멍해집니다.

김충성: 어떤 분들은 그러더라고요 너는 압록강 넘을 때 부모님 생각도 안하고 넘었냐? 그런데 다음날이면 총살당한다고 하니까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 쪽에 딱 도착하고 나니까 부모님 생각이 나고 형제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 북한 땅을 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사실 1년 만에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제가 압록강 넘을 때도 김일성 초상 휘장을 달고 넘었었거든요. 나는 지금 경제상황이 조금 어려워 여기 돈 벌려고 왔지 내가 우리 조국과 장군님을 배반한 것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제가 건넜습니다. 그렇게 중국에서 내륙 쪽으로 들어갔는데 중국 시장에서 제가 조선족 아줌마를 만났는데 그분을 만나 그분이 하는 욕에서 충격을 먹었습니다. 그분이 너 가슴에 단 것이 뭐니 해서 우리 장군님 초상 휘장이라고 했더니 막 욕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장군님을 욕하지 말라고 했더니 그 아주머니가 한다는 얘기가 너희 장군님이 그렇게 좋으면 조선에서 살지 왜 여기 중국으로 왔니 하시더라고요. 나를 죽인다고 해서 도망쳐 왔는데 그때까지도 김정일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죠.

중국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남한에 간 것은 2004년. 남한 정부가 전세기를 동원해 베트남에서 탈북자 466명을 실어 나를 때 그중 한 명에 끼었습니다. 그리고 남한에서도 노래를 부르며 살지만 북한에서 그가 부르던 그런 노래는 아닙니다.

김충성: 일단 제가 좋았던 것은 북한에서는 아무리 노래를 해도 노래한 것에 대한 대가가 없습니다. 북한에선 음악생활 할때는 고작해야 김정일이 표창하는 것밖에는 없었는데 여기선 노래 한곡하면 공연 출연료가 정해져 있습니다. 노래를 하면 보상이 있는 겁니다. 그게 너무 좋았습니다.

북한에서 인민배우를 하던 사람 또는 선전대에서 활동한 배우들이 남한에서도 그 직업을 이어가려고 시도를 많이 합니다. 북한의 노래는 부르는 창법이 남한과 달라 새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론 어색해 하는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김충성 씨가 부르는 노래는 어땠을까?

김충성: 북한 여자 노래를 여기서 하려면 독특한 창법 때문에 남한 사람들이 따라 부르기 힘들어합니다. 북한 여성 노래에서는 북한 냄새가 난다고 하는데 제가 노래를 하니까 북한 냄새가 안 난다는 겁니다. 남자들 노래도 여자들처럼 독특한 발성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남자 노래는 북한이나 남한이나 발성 방법이 같습니다. 남자 노래는 거의 비슷합니다.

남한에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기 가수가 아니면 사실 수입이 보장 안 되기 때문에 생활이 어렵습니다. 몇 해 전 결혼을 해 아직 신혼인 김충성 씨도 가정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인데 경제적 어려움은 없는지?

김충성: 생활이 됩니다. 지금 공연도 하고 수입원이 있어 궁핍하게 살진 않습니다. 제가 또 돈에 대한 욕심이 없거든요. 그래도 북한에 있는 부모형제를 돕자면 돈이 필요하긴 합니다. 지금은 6월 1일 새 음반이 나오는데 그것 만드는데 모든 것을 쏟고 있습니다.

불어라 통일열풍아 노래: 바람아 불어라 통일의 열풍아 차디찬 북녘 땅이 녹도록 불어라 바람아 불어라 .....우리의 염원안고 힘차게 불어라....

북한땅에 자유와 생명의 바람이 불기를 염원하면서 이 곡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가수 김충성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사이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