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기부 자금을 받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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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에서 매주 화요일 건강과 관련해 상담을 해주는 탈북 동의사가 있습니다. 바로 강유 선생님입니다. 벌써 4년째 저와 함께 북한주민에게 필요한 건강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방송을 듣는 분들은 강유 씨가 어떤 분인지 궁금해 하실 텐데요. 이번에는 1999년 탈북한 강유 선생님의 이야기를 2회에 걸쳐 전해 드립니다.

기자: 선생님의 고향은 어떤 곳입니까?

강유: 네, 제가 살던 곳은 함경남도 홍원군입니다. 함경남도에서도 홍원군 하면 바다도 있고 산도 있고 경치도 좋고 기온도 좋고 여러 가지 물고기가 잡힙니다. 그중에서 털게는 홍원 특산물입니다. 한 개 무게가 1kg정도 되는 것도 있는데 그 맛은 너무 특별해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기자: 그곳에서 보건일꾼으로 일하신 거죠?

강유: 그렇죠. 동의사로 일했습니다. 홍원에는 전진수산이 있는데 이곳은 동해에서 명태가 제일 많이 나는 곳입니다. 홍원 바다에서 약 5km나가면 신포가 있고 신포와 홍원 앞바다가 전국에서 명태가 제일 많이 잡히는 곳입니다. 명태가 잡히고 나면 가자미나 게털개가 잡히고 했는데 전국적으로 학생들을 보면 평양과 홍원 아이들이 제일 키가 컸습니다.

기자: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면 홍원군이 참 살기 좋은 곳인데 언제부터 살기가 어려워진 겁니까?

강유: 홍원도 80년대 후반부터 힘들었습니다. 한국에서 88올림픽을 했을 때 북한에서도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열었습니다. 그 축전을 치르고 나서 벌써 느끼는 것이 나라가 경제적으로 기운다는 감이 오더라고요.

기자: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은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강유: 사회주의 국가는 공급체계로 돼있는데 공급가지 수가 줄었습니다. 설탕, 기름, 술, 빵 등이 그전에는 세대별로 인원별로 상점에서 공급해 줬는데 그것이 줄고 하다가 90년대 들어서면서는 아예 상점에서 공급이 없어졌습니다. 식량이 공급되지 않으니까 그러더라고요.

기자: 92년 선생님이 홍원군 진료소장이 되시면서 당원으로 계셨는데 90년 이후 진료소를 찾는 환자가 좀 틀렸습니까?

강유: 네, 좀 틀렸습니다. 90년대 전까지는 인민반별로 왕진 나가고 인민반별로 질병관리를 했습니다. 위생선전, 위생사업, 접종사업도 봄, 가을, 겨울 나가서 하고 했는데 90년대 들어서 접종 수도 줄어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환자 수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죠. 그러면서 외국 수입약이 줄고 공급 약이 적었습니다.

기자: 영양실조 환자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강유: 그것은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부터 영양실조 환자가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기자: 아사자가 속출한 고난의 행군시절 홍원군의 현실은 어땠나요?

강유: 홍원군도 다른 곳보다 더하면 더했지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홍원군이 좋다고 해서 평양에서 사람들을 내려 보냅니다. 평양에서 인구가 늘면 해마다 인구를 지방으로 보냅니다. 평양은 적정 인구수를 정해 놓고 절대 그 이상 두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는 것이 홍원인구가 74년에는 10만 명이었는데 90년 지나면서 20만이 넘었습니다. 경작지가 많아진 것도 아니고 생산치가 늘어난 것도 아닌데 인구가 증가하니까 죽는 사람이 더 많았던 거죠. 출근길에 보면 사람들이 모이는 곳 다닐 수 있는 곳인 역전 , 식당 부근 그리고 시장 등에 시체가 널려있었습니다.

기자: 외부세계에서는 어떻게 굶어 죽을 수 있을까 먹을 것을 찾아 나서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데요.

강유: 그것이 안타까운 겁니다. 북한은 홍원에서 함흥가자 해도 증명서가 있어야 떠납니다. 그때는 기차도 안 다니지 자동차도 없지 하니까 그럼 사람 도보로 가야 하는데 먹을 것이 있어야 황해도 가서 쌀을 사오는데 한사람 기껏 짊어지고 가자해도 그 양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길양식이나 되지 식솔을 살릴 수 있는 그런 것은 안 되지 않습니까? 교통까지 마비되니까 더 많이 죽은 거죠.

기자: 선생님은 진료소장이었으니까 끼니는 굶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탈북하게 되셨나요?

강유: 네, 배를 굶거나 끼니를 넘긴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힘든 것은 맏아들이고 부모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7남매 집이었는데 계속 동생들이 우리 집에 오는 겁니다. 나하고 마누라가 출근하고 나면 어머니 아버지 계신데 와서 밥을 먹으니까 어머니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그랬습니다. 안되겠다 싶어 98년에 중국 친척에서 돈을 빌려왔습니다. 그것으로 일부는 장사해서 식량을 사고 나머지 그때 길이 6미터 되는 목선을 건조할 수 있었는데 6척을 건조해서 낚시를 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성원들 공급하고 그것으로 순천제약공장 가서 항생제를 가져온다든가 의약품 관리소에 고기를 보내고는 우리 필요한 약을 받아온다거나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사회주의 체제에 어긋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위부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다가 그 돈이 어디서 났나?

기자: 그때 보위부에 체포돼 간첩죄 혐의를 받으신 겁니까?

강유: 네, 그때 보위부가 정세가 혼란스럽고 하니까 보위부가 뭔가 북한의 법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성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 후에 생각해보니까 그렇습니다. 보위부에 가니까 첫 말이 여기 어딘지 알지? 이러더라고요. 그런데 그 말이 섬뜩하더라고요. 보위부장이 말하는 것이 여긴 들어왔다가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는 곳이야 이러더라고요. 옆에 있던 반탐과장이 하는 말이 중국에서 어떤 돈을 받았어? 안기부 간첩자금 받았어? 똑바로 말하면 살아 나가고 그러지 않으면 너는 여기서 죽어야해 그러더라고요.

기자: 죄목이 간첩죄군요?

강유: 네, 안기부 간첩자금 받은 겁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 동의사 강유 선생님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전해드렸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중국을 거쳐 남한에서 산 세월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