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여러분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인가요? 보통 태어나 자란 곳 혹은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을 고향이라고 합니다. 남한에는 현재 3만 명에 이르는 탈북자가 새로운 곳에 정착해 살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여성은 다시 태어나도 남한에 살고 싶다고 하는데요.
오한나 (가명)씨의 남한생활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오한나: 새 인생을 살아도 앞으로 남한에서 살고 싶어요.
함경북도 청진 출신의 오 씨는 두 번 북송 당하고 세 번째 탈북에 성공합니다. 1998년에 처음 도강을 했고 마지막 탈북이 있었던 99년은 많은 수의 북한주민이 먹고 살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고 또 건넌 사람 수만큼이나 중국에서 강제북송이 이뤄졌습니다.
오한나: 삼지연 쪽으로 북송을 당했는데 거기서 머리도 맞고 배도 때리고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죄인으로 얼마나 비참했는지 몰라요. 가죽혁대로 안전원들이 때렸어요. 처음에는 북송해서 온 식솔이 다 잡혔으니까 너네 그러지 말라 아이들을 봐서 살려준다 하면서 바로 놔줬는데 두 번째는 안 그랬어요. 먹을 것이 없어 다시 탈북해 중국에서 담배농사를 해서 돈을 벌어 두만강을 건너자 했는데 잡혀서 돈 다 뺐기고 북송돼서 빈 몸으로 오고
하도 탈북자가 많이 첫 번째는 아무 말 않고 풀어줬지만 두 번째는 갖은 고초를 겪으며 노동단련대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먹고 살기 위해 탈북 했고 9년을 중국에 살다가 2007년 남한으로 갑니다. 남한에 갔을 때는 오 씨 나이 54살 때입니다. 그는 중국에서 남한에 도착했을 때의 기억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오한나: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북한에서 중국에 갔을 때는 세상이 이렇구나! 북한이 못 살았구나 중국이 제일이다 생각했는데 중국에서 남한에 오니까 말도 같고 문화도 비슷하고 하니까 조국 같아요. 지금까지 사는데 불만은 없고 감사할 따름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외국 여행도 가고 하는데 저는 여행을 간다면 남한의 곳곳을 돌아다니고 싶어요. 너무 좋아요.
중국에서 숨어살면서 나라 없는 설움을 견뎌야 했고 말이 통하지 않아서 꿀먹은 벙어리처럼
살아야 했던 세월이 병이 됐습니다. 그래서 남한에 도착했을 때 제일 좋은 것은 말이 통하고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이었답니다. 이제는 숨어살지 않아도 되고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하나 남한생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오한나: 남한에서 사기꾼이란 사람도 만났지만 그건 인생에 한줌도 안 되는 것이고 뭐가 좋았냐 하면 예전부터 아는 사람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많았어요. 제가 그것을 느꼈어요. 옛날에 북한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는데 하도 경기가 나빠지니까 마음이 악해졌는데 살기만 좋았으면 북한에서도 이런 마음이 아닐까 싶고 또 시골에 가보면 경운기를 가지고 농장원들이 농사를 쉽게 하더라고요. 이런 것을 북한에 보냈으면 농사를 얼마나 쉽게 하겠는가 하는 생각에 눈물이 막 나더라고요.
기자: 북한에서는 농사를 짓다가 나오셨나요?
오한나: 시내에서 살았어요. 남편이 주유소에서 일했으니까 사는데 부러운 것은 없었는데 남편이 돌아가신 다음에는 우리가 알거지가 됐어요.
아들과 딸 둘 그리고 오 씨 이렇게 네 식구는 남한생활을 하게 됩니다. 우선은 정부에서 임대아파트도 주고 정착금을 줘서 기초생활은 보장이 되지만 아직 건강이 허락을 하니 뭔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싶었습니다. 그런 오 씨를 주변에서 도와 취업 합니다.
오한나: 2008년 1월에 집을 받고 광주에 왔어요. 그리고 여름에 간병인 교육을 받고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서 그 일을 하면서 살았는데 일하면서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더라고요. 이런 치료도 못 받고 돌아가셨구나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혼자 거동이 불편한 노인 그리고 치매나 중병으로 간병이 필요한 사람은 요양원이란 곳에서 돌봐줍니다. 오 씨는 그런 곳에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자신의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다는 겁니다. 자기도 북한에 계속 살았다면 아마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라며 거듭 남한 생활에 만족한다고 했습니다.
오한나: 다 좋아요. 저는 만족하고 우리 아이들도 하고 싶은 것을 하고요. 아들은 취직하고 큰딸 작은 딸 다 대학을 다니고 해서 나름대로 잘 살고 하니까 우리는 적응을 했다고 봐야죠. 여기선 자본주의 국가여서 아무거나 사업해서 먹고 사는데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라 장사를 하지 못해요. 우리는 장사를 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장사할 줄 모르니까 거기 있었으면 모두 죽었죠. 그런데 여기 와서 새 생명을 얻고 자기 일을 하니까 지금도 꿈처럼 생각이 되요.
일하다가 힘들면 몇 달 쉬고 그리고 다시 기력을 되찾으면 일하고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요즘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봉사일을 하는데요. 교회 건물을 새로 짓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인부들의 식사를 보장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입니다. 노래도 많이 흥얼거리고요.
오한나: 아름다운 마음들이 제목이 그래요.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 주의 은혜 나누면 예수님을 따라 사랑해야지...
이제 환갑을 겨우 넘긴 나이인데 젊을 때 고생을 너무해서인지 남한사람보다 체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오한나: 걷기 운동을 해요. 당수치가 높지는 않은데 정상보다 높아서 음식조절을 하면서 30분 아침마다 걷는 운동을 해요.
오 씨는 남한에서 취득한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육체적으로 힘든 이의 눈이 되고 지팡이가 되고 마음을 위로하는 친구가 돼서 사랑을 나누며 살고 싶다고 합니다.
오한나: 앞으로도 저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는 어려운 분들을 돌보고 베풀고 싶어요. 제가 간병인 일을 하고 했으니까 병원에 가서 아파 못 움직이고 하는 분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오한나(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