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부모는 밖에서 힘든 일이 있었다고 해도 보통 저녁에 집에 돌아와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을 보면 쌓였던 피곤이 다 풀린다고들 말합니다. 그리고 또 아이들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까지 하게 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데요. 올해 남한 생활 10년째가 되는 탈북여성 박영순(가명) 씨는 아들, 딸들이 잘 커줘서 더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박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박영순: 내가 아이들과 같이 나가면 여기 사람들은 아이들이 어릴 때를 봐나서 큰 모습보고 깜짝 놀랍니다. 얼굴도 사진을 보여주면 연예인 같다고 합니다.
일곱 살, 열 살, 열 네 살이던 아들, 딸들이 이제는 둘은 고등학교를 다니고 큰 딸은 스물세 살 처녀가 돼서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삼남매 얘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박영순 씨는 어느새 남한생활이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10년 꼭지를 찍었습니다.
박영순: 여기서 10년이 되지만 별로 힘들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돈에 대한 욕심이 없고 그냥 빚 안지고, 아이들 배곯지 않고 또 아이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을 잘하고 하니까 별로 힘든 일이 없는데 처음에는 남한사회 적응 일자리 찾는 것 그리고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까 이런 고민을 했지...
입국 당시엔 모든 것이 새로웠고 사회에 적응하는 문제들이 하나도 쉬운 것이 없었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니 참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뿐입니다. 박 씨가 중국 생활 4년을 거쳐 남한에 간 것은 2002년입니다.
박영순: 제일 처음에는 식당 일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어리니까 몇 시간씩 나가 식당일을 했는데 한번은 길을 잃어버려서 막 헤매고 다녔어요. 지금은 10년이 되니까 못할 일이 없지요. 작년부터는 샘플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샘플 그러니까 견본을 만드는 다는 말인데 어떤 상품의 견본품입니까?
박영순: 견본 책자, 커튼을 만드는 천 샘플과 화장품 넣는 고급 박스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기자: 가족이 다 함께 북한에서부터 움직였기 때문에 힘든 일도 잘 견디실 수 있었는데 중국에서의 생활 하면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일입니까?
박영순: 중국 생활 4년을 다 얘기 하자면 책을 써도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의 고생을 했습니다. 큰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아이들이 셋이고 어리다 보니까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 힘들었고 또 일자리 구하는 것에 제일 힘들었습니다. 또 우리가 신분이 안 되니까 공안이 오면 피해야 하고 이런 것이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너무 힘들었습니다.
함경북도가 고향인 박영순 씨는 1997년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편과 세 아이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중국에서는 하루 세끼 먹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뿐 설움의 연속입니다.
박영순: 맹장이 조금씩 아팠는데 막내 젖을 먹일 때니까 맹장에 주사를 맞으면 모유가 안 나온다고 해서 참았는데 중국에 넘어가 병이 재발해 만성이 돼 거의 터지기 직전인겁니다. 그런데 남의 나라에서 돈도 없는데 수술은 생각지도 못하죠. 나중에 친척 도움으로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병원에 가서 수술일 잘 받고 빨리 회복이 돼서 일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는 1년 동안 일했는데 돈 한 푼 못 받고 쫓겨났어요. 돌이키기도 싫고 그때 생각하면 진저리가 납니다.
탈북과 중국에서의 생활 그리고 남한입국 과정 중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생사고락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렵게 찾은 남한생활이 그동안 순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남한 아이들과 함께 하는 학교생활에 어려움 없이 잘 적응해 줬기 때문입니다.
박영순: 저희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하면서 학원 보내고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형편도 아니었고요. 그냥 자율에 맡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나이가 되니까 아이들이 알아서 하더라고요. 저는 아이들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은 없습니다. 여기는 공부를 해서 대학을 나와서 직업 찾기가 힘들잖아요. 그래서 기술을 배우라고 했죠. 아이들이 손재주가 있거든요. 딸이 피부미용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해서 딸 둘 다 그쪽으로 공부하고 있어요.
큰딸과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인 둘째 딸은 머리와 피부를 관리해 주는 그러니까 북한식으로 말하면 리미용사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전기 기술자로 자신은 생산 공장에서 모두가 맡은 일에 충실하며 너무도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이제 남한에서 만 10년을 살았는데 남한과 북한의 생활이 제일 다른 점이 어떤 것이든가요?
박영순: 북한에 있을 때는 항상 가슴 졸이고, 얘기를 맘대로 못하고, 어쨌든 경찰을 보면 죄를 안지어도 벌벌 떨고 그 만큼 경찰의 힘이 세다는 거죠. 그리고 거기는 내가 일을 해도 국가에서 배급을 조금 주고 하니까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없었는데 여기는 내가 벌면 버는 것만큼 이득이 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편한 것 같습니다. 남한 사람들이 돈, 돈, 돈 때문에 그렇지 편한 것 같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보통 사람으로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사는 모습. 박영순 씨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알차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박영순: 꿈은 크지 않습니다. 다른 탈북자들을 보면 혼자 온 사람도 있는데 저희는 자식도 다 있고 마음이 안정되니까 이정도 살면 불만은 없고 한데 다른 것보다 자식들이 커가니까, 큰 아이가 23살인데 어떤 남자를 만나 잘 살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신랑이나 저나 목숨을 걸고 여기 까지 왔으니까 잘살아야겠다. 열심히 그냥 사는 것밖에 없겠죠. 그리고 아이들 잘되기를 바랄뿐이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 생활 10년이 되는 탈북여성 박영순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사이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