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많은 수의 탈북자가 남한에 가서는 자신도 모르고 있던 지병이 악화돼 치료를 받습니다. 아무리 현대 의학이 발달했어도 병이란 것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도 하는데요. 오늘은 중풍에 이은 척추협착증으로 재활 치료를 받고 있는 남한생활 만 7년차 탈북여성 이경희(가명) 씨의 이야기입니다.
이경희: 침상에 있을 정도는 아니고 그래도 누웠다 일어났다 걸어 다닐 수는 있는 상태에서 입원했어요.
평양이 고향인 올해 66세인 이경희 씨는 최근 퇴원을 해서 건강 회복을 위해 애쓰는 중입니다. 이 씨는 지난 2005년 남편과 딸 이렇게 세 식구가 남한에 갔습니다. 정부에서 탈북자에게 주는 임대주택 아파트를 받고 본격적으로 생활을 시작한 것은 다음해인 2006년 3월. 당시엔 거동에 불편함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돈 버는 일에 열중합니다.
이경희: 2008년에 풍을 맞았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한국에 와서 일하는 만큼 벌수 있으니까 밤낮없이 일했어요. 낮에는 청소일하고 밤에는 사우나에서 일했어요. 고혈압인데 하루 3시간씩 자면서 잠도 잘 못자고 일하다 보니까 쓰러진 거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기자: 그렇게 몇 년을 일하신 겁니까?
이경희: 한 3년 했어요. 1년은 낮 밤을 일하고 2년은 밤에 사우나에서만 일했어요. 양약은 보험이 되는데 한약은 안 되니까 돈을 많이 썼습니다. 한약 달여 먹고 침으로 치료를 받아서 돈이 많이 들어갔어요. 내가 지혜롭지 못해서 그래요. 북한에선 돈을 벌어도 나라에 돈이 들어가지만 여기선 다 내 돈이니까 세 식구가 열심히 벌면 금방 부자가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천천히 돈을 벌 생각을 했으면 병도 안 얻었을 텐데...
이 씨가 탈북한 것은 지난 1990년대 중반으로 평양에서 함북도로 가서 살다가 국경을
넘었습니다. 중국에선 산속에 움막을 짓고 식용 개구리를 양식하는 하마장 관리일을
했습니다. 비록 숨어 살았지만 남편과 함께 있어 살만 했다고 말하는 이 씨는 산에서
생활하는 중에도 늘 외부 세계 소식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유를 찾게 되는 날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이경희: 중국에 있을 때는 미국 자유아시아방송을 들었는데 한국에선 방송을 못 들어요.
중국 연변에 있을 땐 8년 동안 잘 들었는데 이젠 들을 수가 없어요. 여기 우리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요. 중국에선 밤이면 12시에 기다렸다가 들으면 진짜 마음에 와 닿아 좋았는데 지금은 들을 수가 없어요.
남한에서는 매일 원하는 방송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통해 보고 들을 수 있는데도 북한 주민을 향하는 단파방송에 아직도 향수를 느끼나 봅니다. 대량 탈북이 있었던 1990년대
말이나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탈북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야밤에 도강을 했지만 이제
탈북하는 사람들은 먼저 남한으로 간 가족을 통해 소식도 듣고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다가 나오는 사람들이어서 예전하고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도 이 씨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경희: 지금이야 단속을 한다고 하지만 전화나 어떤 통로를 통해서건 남한이 잘 산다는 건 다 알아요. 아니까 오고 싶은 심정은 다 있는데 경계가 너무 심하니까 마음이 약한 사람은 이러다 살다 죽는 거다 하고 주저앉는 거고 죽기를 각오하고 용기를 내는 사람은 오고 그런 거죠.
먹고 살만해지면 병이 찾아온다고, 힘들게 살 때는 몰랐는데 긴장이 풀리면서 그리고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고서야 그동안 잘 먹지 못하고 몸을 혹사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이경희: 그때는 중국에서 숨어 살면서 아픈 것을 몰랐어요. 산 공기가 좋으니까 아픈 것을 몰랐는데 남한 오려고 북경에 6개월 있으면서 먹고 집에 가만있으니까 살이 찌더라고요.
한국 와서 진단을 받으니까 고혈압이래요. 그때부터 약을 먹었어요. 내가 2월에 12일 입원했는데 160만원이 나왔더라고요. 1년 동안 입원했으면 더 많이 나왔겠죠.
기자: 그 돈을 다 자기 부담하셨나요?
이경희: 지원재단에서 30% 받았습니다. 진단서를 첨부해서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에 제출하고 받았습니다. 다행이에요. 감사한 일입니다. 지금 말할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 돈을 떠나 감사한 겁니다. 지금은 편안하게 운동도 적당히 하고 편안하게 있습니다.
이 씨의 남편은 이제 일흔 살이 가까워 오지만 아직 젊은이들 못지않은 정열로 일하고
있습니다. 5층 백화점 건물에서 차가 나가고 들어오는 일을 안내하는 주차요원으로 있는데 건강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생활은 정부지원금과 남편의 월급으로 큰 지장은 없이 삽니다. 다만 남한 생활에 불편함이 있다면 바로 이것!
이경희: 다 좋은데 여기는 공기가 너무 나쁘니까 잡병이 많아요. 북한에서는 너무 못
먹어서 영양 때문에 병이 오지만 여기는 너무 잘 먹어서 병이 오는 차이가 있더라고요.
기자: 사시는 곳도 공기가 나쁩니까?
이경희: 전체적으로 나쁩니다. 달은 봐도 별은 못 보잖아요. 시골에 가면 보겠지만 서울에선 별을 못 봐요. 공기가 나쁘니까 작물도 아무리 무공해 재래라 해도 무공해가 될 수 없어요. 친환경을 만들려면 나무가 많아야 되고 자동차 공해도 줄여야 하는데 그런 것을 못하잖아요. 북한엔 차가 많지가 않고 공장이 별로 없으니 환경은 좋은데 여긴 안 그래요.
1년에 한 번 세계 여행도 가고 싶고 비행기를 타고 가고 싶은 곳도 많은데 건강이 안
따라 주니까 그게 작은 안타까움입니다.
이경희: 진짜 새도 마음대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사는데... 북한에 있을 때도 비행기를 타려면 무역 일이나 장관급만 타니까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돈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데도 이 좋은 곳에서 너무 무리하게 일해서 병을 만나 내 마음과 뜻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워요. 이제는 마음을 편히 하고 긍정적으로 삽니다. 병은 마음에 있다고 하잖아요.
크게 아픈 후 세상 욕심을 모두 놓아 버리고서 찾은 자유로움, 이 씨는 이제 화내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경희: 굶지 않고 밥만 세끼 먹고 살면 되요. 집 있고 밥 먹는 것 걱정 없으면 되죠.
전 욕심 안 부립니다. 저는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이경희(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