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탈북자들은 남한에서 접하는 전자제품 기기를 사용하면서 충격을 받습니다. 모든 것을 사람의 힘으로 하다가 그 일을 남한에서는 기계가 대신 하기 때문에 당황스러워하는 건데요. 오늘은 탈북대학생 이지영(가명)씨의 남한생활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이지영: 저는 2010년에 탈북 했고 가족 중에 탈북한 사람이 있다고 다른 일은 못하고 옥수수를 팔았는데 그때 홍수가 많이 나서 두만강 연선에 피해가 많아 안 좋은 모습을 보고 떠났죠.
가족 중에 행방불명 처리된 사람이 있어 취직도 안 되고 장마당에 나가 일해 근근이 끼니를 때우다가 이렇게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결심하고는 24살 된 해에 두만강을 건넙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남한 땅을 밟게 됩니다.
이지영: 사실 남한에 대한 정보가 없었어요. 친척이나 가족 중에 남한에 간 사람이 있어서 무작정 남한에 갔는데 상당히 낯설었어요. 어디서 뭣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고 무엇을 해야 하고 뭘 하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고 상당히 혼란스러웠죠.
기자: 남한에 도착했을 때 첫 인상은 어떤 것이었나요?
이지영: 상당히 발전돼서 이런 세상도 있구나. 사람들이 머리도 좋다 어떻게 이런 기계를 만들어낼 생각을 했을까? 이런 신기한 경험을 했고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한국말인데 왜 영어 비슷한 말을 쓰지? 하면서 못 알아듣거나 그런 부분이 어려웠어요.
기자: 신기한 물건이 있다고 했는데 뭡니까?
이지영: 예를 들자면 화장실에 갔는데 수도꼭지가 없더라고요. 한참 두리번거리다 보니까 옆에 사람이 그냥 손을 가져다 대니까 물이 나오더라고요. 또 어떤 화장실은 사람이 일어나니까 알아서 자동으로 물이 내려가더라고요. 저희는 재래식으로 변소라고 해서 밖에 땅 파고 구덩이에 볼일보고 했는데 그런 사소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저는 남한 드라마도 못 보고 탈북 했기 때문에 그랬어요. 가는 곳마다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지하철도 들어가면서 찍으면 내가 돈 낸 것을 알고요. 남한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봐도 저에게는 충격이었고요. ATM 기계가 제일 신기했어요. 남한은 돈을 안가지고 다니고 카드를 하나씩 가지고 다니는데 돈을 은행에 맡기고 카드로 돈을 찾는데 처음에는 기계가 고장 나서 혹시 내 돈을 못 찾으면 어떻게 하나 해서 카드 넣었다가 다시 빼고 그랬어요.
모든 것이 자동으로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기계가 알아서 해줬다는 겁니다. 이 씨가 제일 놀랐다고 한 것은 은행에서 사용하는 자동출납장치 기계사용인데요. 은행에 가지 않아도 은행에서 시내 곳곳에 설치한 기계를 통해 돈을 저금하거나 또는 찾아서 쓸 수 있어 충격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 씨는 남한사회 즉 자본주의 새 세상을 더 잘 알기 위해 대학에 진학합니다.
이지영: 저는 대학을 가겠다고 탈북하면서 생각했어요. 오자마자 대학을 가자고 했는데 어렵더라고요. 북한에서 공부한 거랑 남한 수준 차이가 크게 나다 보니까 남한친구들을 따라갈 수 없었어요. 수소문을 해보니까 교회에서 영어, 수학, 국사를 가리켜 주는 것이 있더라고요. 거기서 좀 준비를 해서 다음해 대학입학을 했어요.
남한에 도착한 후 경제적 활동을 통해 돈을 버는 사람도 많지만 이 씨는 북한에서부터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을 하게 됩니다.
이지영: 북한에선 대학을 가고 싶었는데 일반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전문대학까지만 갈 수 있어요. 그나마도 가보려고 했는데 시험까지는 봤는데 대학을 못 갔어요. 그게 한이 돼서 북한에 있을 때도 북한 대학생이 입는 치마저고리가 있는데 그것 입고 집에서 가방 메고 방안에서 빙글빙글 돈 적이 있어요. 대학은 거기 있을 때부터 꿈이었습니다.
보통 남한에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19살에 대학진학을 합니다. 이 씨는 남한청년들보다 5살 정도 많은 나이였지만 그래도 같은 20대 또래들과 겉보기엔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청춘입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준비를 해서 대학입학을 했는데요.
이지영: 일단은 대학입학 축하 통지서를 받고 바로 대학탐방을 갔는데 굉장히 교정이 넓고 좋더라고요. 나도 이 대학의 성원이 됐구나 하고 설렜는데요. 오리엔테이션을 갔는데 낯설더라고요. 아이들이 대화를 나누는데 선뜻 끼기가 어렵더라고요. 친구들은 연예인부터 시작해서 화장품 얘기를 하는데 아는 게 없다보니까 계속 듣게만 되더라고요. 그리고 학교생활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데 이해를 잘 못하겠더라고요. 강의실도 내가 찾아 가야하고 학점도 최고 점수가 있고 들어야 할 과목이 있는데 전공과 교양에 대해 이해를 못하겠더라고요.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4학년 졸업반인 이지영 씨. 참 세월 빨리 갑니다. 정신없이 입학식을 치룬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반이라니... 대학생활은 좋은 추억도 있지만 좌절과 고비의 순간을 넘겨야 하는 도전의 연속이었답니다.
이지영: 사람 관계에 있어서는 다 원만했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항상 마음의 문을 열고 모르는 부분은 도움을 청하고 해서 다들 도와주더라고요. 인간관계는 크게 상처받거나 힘든 부분이 없었는데 공부하면서 어려운 부분이 많았어요. 예를 들어 교재를 한 번 읽어봐서 이해가 안돼서 두 번 세 번 읽는데 계속 첫 번째 두 번째 장만 읽게 되고 시간은 없는데 외어야 할 것은 많고 영어도 아는 단어도 몇 개 없는데 강의를 듣고 발표를 하자니까 어려웠죠. 혼자 자책하고 슬펐던 일도 많고 북한에서 영어를 좀 더 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
어려울 때 이 씨를 지탱해 주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들려주신 말이 좌우명이 됐습니다.
이지영: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인데 사실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는데 지금은 힘이 되는 말씀이에요. 사회에서 사람들이 네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될 때 행복을 느낄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그게 그렇게 행복할까 싶었는데 상당히 행복하다고 생각이 들고 앞으로도 그런 것들을 위해 더 노력할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주변 친구들이 지영아 네가 꼭 필요해 네가 이런 것들을 도와줬으면 좋겠어. 또 조직에서도 내 위치가 확고해지고 할 때 그런 일들을 해냈을 때 집에 오면 굉장히 마음이 뿌듯하죠. 그런 것이 내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대학생 이지영(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씨의 대학생활의 낭만과 해외여행에 대해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