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와 헤어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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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말은 알아듣겠는데 이해를 못 하겠다. 우리말인데 외국말보다 어렵다는 말을 남한에 간 탈북자들에게서 많이 듣게 됩니다. 남한에서는 외래어를 많이 섞어 쓰기 때문인데요. 오늘은 40대 중반의 탈북여성 서혜연(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이제 정부에서 저소득 가정에 지원하는 기초생활보조금을 받지 않고 일반 남한사람과 똑같은 경제적 자립을 한 서혜연 씨. 우선 서 씨가 어떻게 남한에 가게 됐는지부터 들어봅니다.

서혜연: 1997년에 탈북 했습니다. 탈북 당시는 한국에 오려고 한 것은 아닌데 중국에서 한국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다 2001년에 중국 공안에 체포돼서 북송돼서 6개월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2002년에 재 탈북해서 중국으로 왔는데 와서 한국에 오려고 했는데 길을 몰라 거기서 6년 정도를 있었습니다.

이제 남한생활이 7년이 됩니다. 정착 초기를 생각하면 같은 말인데도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창피했던 순간도 많고 또 남쪽에서 쓰는 일상용어를 몰라 당황했던 기억도 많은데요.

서혜연: 머리하러 가야 하는데 북한같이 생각하고 이발원을 찾아갔어요. 들어가니까 70살 넘은 아저씨들이 쭉 앉아있는 거예요. 의자는 북한같이 있는데 여자가 들어오니까 어떻게 왔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머리 자르러 왔다고 하니까 여자는 미용실, 헤어숍에 가야 한데요. 그때 알았죠. 내가 나올 때 이발원 간판 옆에 빙빙 돌아가는 것이 있는데 그게 있으면 머리하는 곳이구나 하고 기억했는데 한번은 그것을 보고 들어갔더니 찜질방인거예요.

이발소, 머리 방, 헤어숍, 미장원 이런 간판은 전부 머리를 손질하는 곳입니다. 대개 남자는 이발소로 그리고 여자는 미장원 또는 헤어숍을 갑니다. 여성전문 머리손질 업소에서는 남자 머리도 할 수 있지만 이발소에는 여자 머리를 안 하는데요. 일단 머리 손질 기구도 다르고

머리 모양을 내는 방법도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남한은 머리 손질 하는 것도 전문화 돼있습니다. 서 씨가 말한 이발소 앞 빙빙 돌아가는 것을 보고 들어갔다는 것은 이발소 앞에 설치된 청색, 홍색, 백색의 둥근 기둥으로 전 세계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이발소 표시를 말하는 겁니다. 찜질방이라고 불리는 대중목욕탕 안에도 이발사가 있기에 이 기둥이 걸려 있어 서 씨가 오해를 했던 겁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습니다.

서혜연: 저는 처음 와서는 자격증도 없고 해서 갈빗집에서 일하고 추어탕 집에서도 일하고 식당일을 했어요. 일하는 것이 힘든 것보다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 힘들더라고요. 저기요, 맥주 주세요. 하면 알아듣는데 저기요, 카스 주세요. 하니까 카스가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기자: 그렇죠. 맥주 상품명을 부르니까요.

서혜연: 카스, 하이트 이러니까 모르겠는 거예요. 또 음료수를 드리면 병따개 주세요 하면 알겠는데 북한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오프너를 주세요. 이러니까 모르겠는 거예요. 그리고 대전에 한국자유총연맹이라고 있는데 거기서 청소 일을 했어요. 그때 내 나이가 40살이었죠. 솔직히 창피한 것도 있지만 식당일 보다는 이일이 더 낫겠다 해서 사무실, 화장실 청소를 한 3년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력서를 내서 사무직 일을 했는데 내가 부족한 점은 많았지만 도전을 해보자 해서 이력서를 내서 충남대학병원 북한이탈주민 의료상담실에서 간사로 일하게 됐죠.

기자: 북한에서의 직업은 뭐였나요?

서혜연: 저는 북한에서는 군수품 공장에서 근무했었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직업이었죠.

지금은 다 쑥스러운 정착과정에서의 이야기이지만 당시엔 얼굴이 화끈거리고 화도 나는 일들입니다. 그래도 감사하고 또 고마운 것은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서 씨는 중국에서 공안에 체포돼 강제북송을 당한 후 북한에서의 6개월을

잊을 수 없습니다.

기자: 북송 됐을 땐 전거리 교화소에 있었나요?

서혜연: 아니요. 저는 온성 보위부에 있다가 청진 라남 집결소에서 6개월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탈북 당시에 고향이 함경북도 무산인데 거주지에서 사람이 와서 데려가야 하는데 거주지 불명으로 해서 사람이 안와 라남 집결소에서 있었습니다.

다행히 중국에서 북한으로 문건이 넘어갈 때 식당에서 일하다 잡혔고 혼자였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간 것이라고 해서 정치범 수용소행은 피할 수 있었지만 집결소에서의 생활도 사람이 정상적으로 지낼 수 있는 곳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서혜연: 남자들도 하기 힘든 일을 했습니다. 시멘트 한 장에 10kg이 넘는 무거운 것을 석장 넉 장을 등에 지고 집 짓는 곳에서 일했습니다. 먹을 것은 밀가루 통밀을 뜨면 세 숟갈 정도 되는 것을 먹고 살았습니다. 체중이 51kg정도 되는데 6개월 되서 나올 때 37kg정도까지 줄었습니다.

기자: 키는 몇인데요?

서혜연: 제가 153cm입니다. 혼자 걸어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래도 살아나올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어요. 왜냐하면 거기에 400 명 정도가 있는데 매일 죽어 나가는 사람이 3-4명 정도 됐어요.

북한 집결소에서의 생활 그리고 재 탈북 후 중국에서의 6년이 있은 후 남한에 도착했을 때는 물론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게 됐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도 나왔지만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놀라움도 함께 펼쳐집니다. 남한에 도착했을 때의 기억입니다.

서혜연: 저는 인천공항에 내려서 공항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공항도 으리으리하고 차가 너무 많아서 신기했어요. 말은 못했는데 직감으로 알았죠. 수용차가 많을 것을 보니 잘사는구나. 북한에서는 간부만 차를 타니까 남한에는 간부가 정말 많구나. 그렇게 생각했죠.

그런데 그 차를 운전하는 사람을 보고 서 씨는 또 한 번 놀랍니다.

서혜연: 제일 또 신기한 것은 여성이 운전하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어요. 혹시 차를 타면 마주 오는 차가 부딪칠까봐 무서웠는데 여자가 운전하는 것을 보고는 위대하게 봤죠. 그런데 제가 한 2년 전에 운전면허를 땄는데 그냥 밟으면 가더라고요

기자: 그러면 지금은 운전을 하시는군요?

서혜연: 네, 지금은 운전을 하고 다닙니다.

처음 남한에 가서는 식당일과 청소 일을 했다는 서 씨는 현재 탈북자들의 병원 이용을 돕는 의료상담실에서 상담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직업을 갖게 됐는지 청취자 여러분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서혜연: 저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많이 노력했습니다. 자격증도 따려고 하고 수료증도 따고요. 통일 교육원에서 하는 눈높이 통일 교육 강사 자격증도 땄고 북한이탈주민 상담 사 자격증도 땄어요. 공부를 해서 주말 쉬는 날을 이용해서 자격증을 따고 컴퓨터를 배우는 그런 과정이 있었죠.

서혜연 씨는 현재 생활에 너무 만족하는 데 그 이유는 남을 도우면서 자신의 생활도 보장되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랍니다. 이건 현재의 만족이고 앞으로의 계획은 또 따로 있는데요. 그 꿈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서혜연: 지금은 우선 건강이 중요하다고 봐요. 건강해야 뭐든 할 수 있는 것이고 앞으로는 요양 보호사 국가 자격증이 있으니까 10년 후에는 요양시설을 하나 꾸리고 싶어요. 그래서 북한에서 온 무연고 어른들 모시면서 즐겁게 보내려고 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서혜연(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