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고향] 아들과 재회, 14년이 걸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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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한의사 김지은 씨. 사진-김지은 씨 제공

보고 싶은 얼굴, 꿈에도 그리운 사람이 있는데 지척에 두고도 만날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청취자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일곱 살이던 아들과 생이별을 하고 남한에서 홀로 10년을 기다리는 세월 속에 자신은 한의사로 성공했고 결국 아들을 불러와 남한에서 같이 살게 됐습니다. 오늘은 진한의원 원장 탈북여성 김지은 씨(사진)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북한의 식량난이 극심할 때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김지은 씨는 남한생활이 올해로 10년이 됩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생활을 포함해 아들과 다시 만나기까진 14년이 걸립니다.

김지은: 처음에 한국에 왔다고 해서 만나러 갔을 때 문 앞에서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가슴이, 심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 못하겠더라고요. 너무 떨렸습니다. 그런데 얼굴을 딱 보는 순간에 저의 아버지를 닮아서 그냥 어디 밖에 나가도 너는 김지은의 아들이라고 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남한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자녀가 부모의 얼굴을 꼭 빼닮았을 때 아이에게 너는 엄마 아빠 붕어빵이구나라고 합니다. 팥을 넣은 밀가루 빵이 있는데 밀가루 반죽을 빵틀에 붇고 구워내면 그 모양이 모두 같은데서 나온 말이죠. 이제 어른이 다 돼서 만난 아들은 정말 말하는 버릇, 몸동작 습관까지 하는 짓이 자신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신기하기만 한데요. 이런 아들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도 김지은 씨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김지은: 아들이 먹고 싶다고 저한테 얘기 했던 것은 아니고 인터넷을 보다가 오징어 순대 음식 사진을 보고는 딱 보면서 맛있겠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저에게 동의 아닌 동의를 구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확 막히더라고요. 아이가 먹고 싶구나, 그것이 엄마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기자: 사실 아들의 나이가 청소년기이면 엄마가 아들을 더 보살펴 주고 신경을 쓰겠지만 21살이니 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주고 하는 그런 것은 많이 없겠어요?

김지은: 마음은 항상 해주고 싶죠. 그런데 워낙 시간에 쫒기면서 사니까 잘 해주지 못하고 있고 그날도 먹고 싶다고 했던 것은 아니고 그냥 보다가 진짜 맛있게 생겼다 그 말 한마디에 지금껏 해주지 못했던 미안함이 가슴에 확 몰려오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만들기 시작했죠. 한 번도 만들어 보지 못한 음식이었지만 한 번 내가 이제 만들어 보겠다 했던 거죠.

기자: 먹고 싶었던 것을 남한에서 엄마가 만들어 주니 꿀맛이었겠어요?

김지은: 네, 그 생각을 하니까 제가 도저히 안 만들 수가 없었더라고 아이는 와 진짜 맛있다 하면서 잘 먹더라고요.

북한에서도 동의사로 환자를 받지만 김지은 씨가 남한에서 바로 일을 이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남한의 의사면허를 받기 위해 아들 나이쯤 되는 학생들과 대학공부를 해야 했고 그렇게 정신없이 공부하는 세월은 아들은 지켜주지 못한 속죄의 시간이요 또 다시 만나는 순간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다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채워졌습니다.

기자: 아들도 엄마생각을 많이 했답니까?

김지은: 엄마만큼은 안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와서 보니까 엄마가 상당히 성공했다고 보는가 싶습니다. 그래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고 엄마가 혼자서 열심히 지금껏 살아온 것에 대해 좀 안타까워하는 면도 있습니다. 애인도 없고 결혼도 안하고 한 것에 대해서요. 자기가 너무 속상하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한국에 와서 10년 살면서 아직 혼자고 손에 반지하나 끼워줄 사람 없이 살았냐고 하면서 꽤 비싼 반지를 내 손에 끼워주면서 엄마 또래 사람들은 다 손에 반지 하나씩 있는데 엄마는 왜 이렇게 빡빡하게 살았냐고 하더라고요. 이제 내가 왔으니까 어머니 이제부터 행복하세요. 이러더라고요.

김지은 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 인근 도시에 진한의원이라고 동의사 전문병원을 차렸습니다.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있었고 어색한 일도 많았지만 어느새 3년을 운영하면서 지역에서 자릴 잡게 됐습니다.

김지은: 그냥 하면 되지 하고 했는데 시작하고 보니까 전혀 익숙하지 않았던 문제로 고민하게 됐습니다. 우선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내가 의사로 환자 치료를 하고 돈을 받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환자에게 항상 무상 치료를 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돈을 받는 것이 너무 어색하고 불편했습니다. 그렇게 지냈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병원에 환자가 많아? 많아야 하는데 이런 말을 할 때 너무 불편했습니다. 사람이 아파야 한다는 현실과 제 머리에 이미 정립된 사고와의 괴리가 상당히 컸고 너무 힘들었습니다. 1년을 외부 활동을 일체 하지 않고 병원을 찾는 모든 환자에 충실하면서 꾸준히 묵묵히 일했습니다. 이제 자본주의 시장경제 속으로 성큼 들어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조금은 민망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받을 만큼 다 받자입니다. 대신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깡그리 주자입니다. 그것이 정성이든 노력이든 의술이던 봉사든 최선을 다해 주자. 환자가 혹 만족을 못해도 스스로에겐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게 한의원을 운영하는 내 마음을 살짝 바꿨습니다.

북한에서의 직업을 남한에서도 이어가게 됐고 꿈에도 그리던 아들도 만났고 이제 모든 것을 이룬 것 같지만 김지은 씨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 명문대학으로 손꼽히는 서울대학 의과대학 인문의학과에 지난해 입학해 석사 과정에 들어갔고 3년 정도 공부해 박사까지 마칠 계획입니다.

김지은: 대학원은 한국에서 살려면 학위가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제가 원하는 것이 남과 북에서 공부를 하면서 앞으로 남북이 통일이 되면 보건정책을 관리하기 위해 뭔가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두 번째는 의료인으로 살면서 사실 이 직업이 환자의 아픔을 같이 나눠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탓에 ‘인문의학과’, 의학과 사람의 심성을 어떻게 결합해서 우리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겠는가를 공부하는 인문의학과로 지원하게 됐죠.

북한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프다는 김지은 씨.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조금만 참고 인내하라는 말뿐이라며 북한주민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김 씨는 이렇게 남한에서 내일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진한의원 원장 김지은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